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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자연 그리고 사람
직장인 생활탐구
  • 가까이하기에 너무 먼 당신
    사적 대화, 투 머치 토크인가? 친밀함의 가교인가?

    • 글. 김성회 CEO 리더십연구소장
      (코치경영원 코치)
우리가 남이가 vs 우리가 남일까 vs 우리는 남이다

‘공과 사를 구별하라’. 예전에 조직에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강조한 이유는 공과 사를 구별하기가 쉽지 않을만큼 끈끈했기 때문이다. 요즘의 밀레니얼 세대들에겐 이 말을 구태여 강조할 필요가 없다. 이미 칼같이 ‘공과 사를 구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맥락에서 다소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선배 세대는 늘 “우리가 남이가”를 확신에 차 구호로 외쳤다. “우리가 남이가?” 하고 선창하면 “아니다, 아니다” 할 때 뭔가 뜨거운 게 가슴에서 솟아오르곤 했다. “이게 술인가?” 하면 “아니다. 아니다, 정이다” 하며 말 그대로 술잔에 정이 담겼다. 사적인 정이 돈독할수록 일도 잘 된다는 게 586 세대 이상의 보편적 정서다. 낀 세대인 X 세대의 정서는 복합적이다. “우리가 남이 아니다”라는 말에 50%의 동의만 한다. ‘우리는 남일까?’ 마음속으로 의문을 가지지만 차마 겉으로 대놓고 의문을 표하지 못해 시늉이라도 구호를 복창했다. 반면에 신세대들은 야멸차게 겉으로도 답한다. “우리는 남이다!”로. 이들은 사적인 관심에 대해 “노 땡큐”라고 답한다. 끈끈한 관심을 표하면 관심을 꺼달라고 깐깐하게 요청한다. 조직생활은 일일 뿐, 사적인 생활과 구분하고 싶다고. 상사, 동료들의 SNS에선 친구 신청을 하지 않는 게 일상의 예의다.

아, 옛날이여. 딱 한 잔, 또 한 잔

‘사적 관심으로 관계의 다리를 놓으라.’ 선배 세대가 조직생활에서 마르고 닳도록 들은 이야기다. 주말에 있었던 가족 이야기 같은 걸로 좀 딱딱한 분위기를 풀어야 인간미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집들이, 자녀의 돌잔치, 부모의 환갑 진갑, 문상까지 생애 주기를 함께 하며 챙겨준 사람들은 다름 아닌 직장 상사였다. 직장 동료 간 친한 사이를 가리킬 때 “그 집 숟갈 수까지 다 안다”라는 관용적 표현을 쓰는 것은 그 반증이다. 모 건설회사의 CEO는 임원 리더십평가를 할 때 “직원의 관혼상제를 사전에 미리 파악하지 못하는 부서장은 부서장 자격이 없다”라고 공언하며 인사고과에 반영할 정도였다. 예전 조직문화에서 직장 상사는 공적인 지식뿐 아니라 사적인 지혜에서도 다양한 정보를 전수해 주는 멘토의 역할을 자임했다. 이렇게 사적으로 엉킨 정은 상사로서 힘든 지시를 할 때 윤활유로 작용했다. “힘들지만 어쩌겠냐, 너 아니면 내가 누구한테 말하겠냐, 좀 애써줘야지” 하는 직장 상사가 어려운 부탁할 때 하는 전가의 보도였다. 선배 세대는 일이 꼬이면 관계로 풀려고 하는 것이 가능했다. 상대의 신상을 속속들이 알고, 일상을 오롯이 파악하고 있었던 덕분이다. “퇴근 후 술 한 잔?” 하면서 ‘딱 한 잔’이 ‘또 한 잔’으로 이어지며 결국은 포장마차 아주머니의 퇴근시간(?)을 늦추고 통사정하며 새벽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심하게 야단친 것, 상사를 치받아 ‘다음 날 아침 사표를 내고(받고) 말리라는 결심은 소주 한 잔에 녹고 마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갈등이 “추웅성” 한마디에 묻혀버리곤 했다.

#사적 대화를 나누려면?

첫째, 사적 대화는 신뢰관계와 비례한다. 최근의 밀레니얼은 인간관계에 민감하다. 자신이 신뢰하지 않는 선배와는 사적 대화를 기피하려는 경우가 있지만, 이들 역시 신뢰를 느끼면 자신의 시간을 할애한다. 일상의 작은 칭찬부터 시작하라.

둘째, 라이프보다 라이프 스타일을 이야기하라. 알고 보면 세대의 문제보다 토픽의 문제다. 사적 영역의 이야기 말고도 친해질 수 있는 이야기거리는 많다. 무엇이 흥미로워하는 공통 주제일까 연구하는 것도 탈꼰대의 방법이다.

셋째, 화두는 던지되 정보를 요청하자. 화두가 너무 크거나, 속이 들여다보이면 관심을 이어나가기 어렵다. 수평적 존중을 하면서 진정으로 호기심을 표할 때 그들은 말문을 연다. 조언이나 훈계를 하기보다 들어보라.

넷째, 거절할 수 있는 쿠션화법을 사용하자. 선배와의 대화에 사전 철벽을 치는 것은 싫은 대화를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예방하고 대화 참여를 북돋우려면 ‘거절할 수 있는 권리’를 아예 처음부터 보장해 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