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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자연 그리고 사람
마을 인문학
  • 강릉의 자연을 그린 화가
    신사임당

    • 글. 최행좌
    • 일러스트. 하고고
  • 강릉이 오롯이 품고 있는 아름다움은 다양한 문화예술의 소재가 됐다. 수백 년에 걸쳐 역사와 문화, 자연환경이 켜켜이 쌓여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에 깊은 영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골목 어딘가에는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멋진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설레는 마음과 편한 운동화를 챙겨 강릉을 만나러 가보자.
“자당(慈堂)께서는 늘 묵적(墨迹)이 남다르셨다.
7세 때부터 안견(安堅)이 그린 것을 모방하여
드디어 산수도를 그리셨는데 지극히 신묘하였고,
또 포도를 그리셨다.
모두 세상이 흉내낼 수 없는 것으로 그리신
병풍과 족자가 세상에 널리 전해진다.
율곡 이이가 지은 「선비행장(先妣行狀, 돌아가신 어머니 행장)」 중에서
예술가의 작품 배경이 된 강릉

신사임당은 외가인 강원도 강릉시 죽헌리 북평촌(현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에서 태어났다. 호는 사임(師任)이다. 13살 때 중국 주나라의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의미로 직접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주인이 기거하는 별채라는 뜻의 ‘당(堂)’을 붙여서 부르다 보니 ‘사임당’이 통칭이 됐다. 신사임당은 어려서부터 안견의 그림을 따라 그릴 정도로 시와 그림, 글씨에 출중했던 예술가였다. 이는 외할아버지와 어머니의 영향이 컸을 듯하다. 유년 시절 외할아버지 댁에서 어머니와 살며 예술과 학문, 교양을 쌓았다.
그는 19살 때 이원수와 결혼했다. 결혼을 하고도 남편과 함께 친정에 머물렀는데, 몇 달 뒤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친정에서 3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갔다. 이후에도 친정에 가서 홀로 계시는 어머니의 말동무를 해주며 지내기도 했다.

삶과 예술이 너울거리는 최고의 무대

경포호의 서쪽 들녘 너머에 있는 오죽헌(烏竹軒). 뒤뜰에 줄기가 손가락만 하고 색이 검은 대나무가 자라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李珥)가 태어난 집이자 그의 수준 높은 문화예술을 펼쳤던 배경이었다. 사계절 피고 지는 꽃부터, 하늘을 날아다니는 나비와 벌, 주렁주렁 익어가는 가지와 수박, 언제나 푸르른 대나무와 난초까지. 강릉의 아름다운 자연이 그의 작품에는 섬세하면서도 자연스럽게 표현됐다. 여러 작품을 남길 정도로 예술혼을 불태웠던 신사임당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아들인 이이나 동시대 문인들의 기록에 남아있다. 당시에 활동했던 시인 소세양(蘇世讓)은 신사임당의 산수화를 두고 ‘동양 신씨의 그림족자’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다고 전한다. 율곡의 스승인 어숙권은 “신사임당이 안견(安堅) 다음가는 화가”라고 했다. 그만큼 산수도를 잘 그린 화가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1551년 눈을 감은 그는 48세의 나이로 그리 길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훌륭한 작품을 남긴 신사임당을 기억하며 그의 예술 세계를 만나기 위해 지금도 많은 이들이 강릉을 찾고 있다.

신사임당 1504~1551년

대표 작품 <자리도>, <산수도>, <초충도> 등
1504년 강원도 강릉시 북평촌에서 태어나 자랐다. 본관은 평산(平山). 사임당(師任堂)은 당호(堂號)다. 신사임당은 아들이 없는 집안의 다섯 딸 중 둘째로 태어나 시와 그림, 글씨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현재 신사임당의 서화 작품으로는 <초충도병풍(草蟲圖屛風)>을 비롯해 풀벌레, 포도, 화조, 매화, 난초 등을 그린 40여 점이 남아 있고, 오죽헌 안에 있는 율곡기념관에 신사임당 서화가 전시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