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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자연 그리고 사람
마을 인문학
  • 윤선도가 그린 물의 정원
    보길도

    • 글. 최행좌
    • 일러스트. 하고고
  • 바다 풍경이 아름다운 완도에서 배를 타고 노화도 동천항에 도착해 다시 차를 타고 보길대교를 건너야 닿는 ‘보물’ 같은 섬이 있다. 조선시대 문신인 고산 윤선도가 정자를 짓고, 연못을 만들어 완성한 ‘물의 정원’이 있는 보길도(甫吉島)다.

녹우당이나 곡수당, 금쇄동, 세연지 모두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물의 원리를 이용했다. 상지와 하지를
만들어 물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해
썩지 않도록 했다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물의 원리를 활용한 ‘부용동 정원’

보길도를 여행하다 보면 마주하게 되는 인물이 있다. 고산 윤선도다. 교과서에 수록된 ‘어부사시사’를 지은 주인공으로, <고산연보>에 의하면 윤선도가 이곳에 온 때는 1637년 2월로 그의 나이 51세 때 일이다.
보길도의 서쪽 해안길을 따라가면 고산 윤선도 유적지인 부용동이 나온다. 그는 섬의 산세가 피어나는 연꽃을 닮아 이 정원을 ‘부용동’이라 이름을 지었다. 또 섬의 주봉인 격자봉 밑에 낙서재를 지어 거처를 마련하고, 그는 85세에 낙서재에서 생을 마치기까지 보길도의 곳곳에 세연정, 무민당, 곡수당 등의 건물과 정자를 짓고 자신의 낙원, 부용동 정원을 가꿨다. 무엇보다 그는 정원을 만들 때 반드시 연못을 조성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녹우당이나 곡수당, 금쇄동, 세연지 모두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물의 원리를 이용했다. 상지와 하지를 만들어 물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해 썩지 않도록 했다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물을 중시했던 그의 과학적 지식의 산물인 셈이다.

자연미와 인공미가 조화로운 ‘세연정’

세연정을 둘러보면 윤선도가 정원 조성에 조예가 깊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아담한 초등학교 옆에 정교하게 꾸며진 세연정은 윤선도가 인공적으로 물을 끌어들여 자신의 심미적 안목에 맞게 조형을 가꾼 정자다.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해 ‘세연정(洗然亭)’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세연정은 부용동 정원에서도 가장 공들여 꾸며진 곳으로 원형이 잘 보존된 곳이다. 그는 약 7년 동안 세연정을 만들고, 파낸 흙으로는 토성을 만들었다. 부용동에서 흘러들어오는 물을 그대로 받아들이되 너무 급하게 물이 흐르지 않도록 바위와 제방을 구축한 것이다. 자연적인 계류를 돌둑으로 막은 연못인 ‘세연지’를 만들고, 다시 그 물을 끌어들여 네모진 인공 연못인 ‘회수담’을 만든 후 연못 사이의 인공 섬에 ‘세연정’ 을 놓았다. 크고 작은 바위들이 세연지의 자연미와 회수담의 인공미가 조화를 이뤄 자연스럽게 물이 흐르도록 고안했다.

기발함이 엿보이는 ‘판석보’와 ‘회수담’

세연정 주변에도 윤선도가 물을 활용한 기발함을 엿볼 수 있다. 바로 세연지의 물을 가두는 역할을 한 ‘판석보(板石洑)’다. 국내 유일의 돌로 된 석조보로, 일명 ‘굴뚝다리’라고 한다. 본래 이곳은 세연지의 저수를 위해 만들었던 만큼 가장 기본적인 물을 가두는 기능을 한다. 평상시에는 돌다리가 되고, 우기에는 폭포가 돼 일정한 수면을 유지하도록 한 것이다. 보의 구조는 양쪽에 판석을 견고하게 세우고, 그 안에 강화를 채워서 물이 새지 않도록 한 다음 그 위에 판석으로 뚜껑돌을 덮었다. 안은 비어서 물이 흐르면 소리가 멀리 울려 퍼지도록 했다고 한다.
‘회수담(回水潭)’ 또한 절묘하게 계산된 것이다. ‘물이 돌아가는 곳’이라는 회수담 안에 큰 돌을 놓아 태극 모양으로 흐른 다음 물이 빠지도록 했다. 세연지에서 회수담으로 물을 끌어들이는 수구는 세연정과 동대 사이의 축단 아래에 있다. 물이 들어가는 쪽은 구멍이 5개고, 나가는 쪽은 3개로 해 천천히 흐르도록 설계했다. 특히 들어가는 쪽이 나오는 쪽보다 30㎝가량 낮게 되어 있다. 이는 수량의 조절을 위해서 만든 구조라고 한다. 이곳으로 흘러든 물은 회수담 안을 한 바퀴 돌아 배수구로 넘쳐 나가게 된다.
맹자 <진심(盡心)> 편에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으면 흘러가지 않는다’라는 구절이 있다. 물은 웅덩이를 가득 채우고 흘러넘친 뒤에야 비로소 다시 흘러간다는 의미다. 자연에서 흘러온 물을 자연스럽게 가뒀다가, 다시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하며 물의 원리를 환경에 활용한 조상들의 지혜가 깃든 이곳에서는 나무 한 그루, 돌 한 개조차 소중하게 보인다.

윤선도 1587 ~ 1671년

대표 작품 ‘산중신곡’, ‘어부사시사’, ‘몽천요’, ‘우후요’ 등
윤선도의 본관은 해남(海南)이며, 호는 고산(孤山)·해옹(海翁)이다. 예빈시부정을 지낸 윤유심(尹唯深)의 아들이다. 8세 때 큰아버지인 윤유기(尹唯幾)의 양자로 들어갔다. 그는 정치 초년생이었던 30대 때부터 80대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소용돌이의 한가운데 있으며 세 번의 유배생활을 했다. 이후 보길도에서 지내면서 ‘산중신곡’, ‘어부사시사’ 등의 작품을 창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