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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자연 그리고 사람
마을 인문학
  • 대전을 대표하는 서정 시인
    한성기

    • 글. 최행좌
    • 일러스트. 하고고
  • 문화예술을 찬란하게 꽃피운 지역을 살펴보면 여러 분야의 예술가가 서로 교류하며 어우러져 뛰어난 작품이 탄생한 것을 알 수 있다. 대전광역시도 예부터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수준 높은 경지에 다다른 예술 작품을 남겼다.

둑길에서 만난 사람은 별로 없었다.
둑길에서 만난 사람은
간혹 낯설은 햇살

열심히 둑길을 걸으면
나는 사람이 보일 것 같아서

열심히 둑길을 걸으면
나는 지구의 끝이 보일 것 같아서

한성기 시인의 시 ‘둑길Ⅶ’ 중에서

대전 문학의 위상을 높이다

한성기 시인이 대전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그가 대전사범학교에 교사로 부임하면서다. 함경남도 정평군 광덕면 장도리에서 태어난 그는 1942년 함흥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그해 4월,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 신촌초등학교로 첫 교사 발령을 받았다.
이후 1947년부터 대전사범대학에서 15년간 교직에 몸담고 있던 도중, 1950년 10월 지병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떠나보내고 세 살이 된 딸과 둘만 남게 됐다. 이때부터 그는 적적한 마음을 달래려 시를 썼고, 여러 곳의 문예지에 시 작품들을 응모하기 시작했다. 1952년 <문예>에 초대작이자 대표작인 ‘역’이 추천되면서 문단에 이름을 알렸다.
이후 현대문학 추천 위원을 겸하면서 박용래, 임강빈, 최원규 등과 함께 당시 대전 문학이 전국적인 위상을 갖게 하는 데 이바지했다. 특히 호서문학을 결성해 활동하기도 했다. 그가 대전에서 활동하며 배출해 낸 문하생만도 수십여 명이다. 비록 가난했지만 제자를 양성하고 작품에 매진한 그는 1984년 뇌일혈로 쓰러져 결국 세상을 떠났다. 대전예술가의 집 정문 옆에는 그의 대표작 ‘역’이 적힌 한성기 시비가 세워져 있으며, 아직도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숱하다.

자연 친화적인 시를 창작하다

한성기 시인은 ‘정직한 서정 시인’으로 평가 받는다. 그의 시는 자신의 삶을 중심으로 솔직하고 간결한 언어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 초기에는 허무 의식을 내비쳤지만, 중기부터는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후기에는 자연 친화와 자기 도야를 통해 자신의 운명을 초월한 면모를 보인다.
특히 1960 ~ 1970년대 유성에 살면서 갑천 둑길을 걸으며 점점 자신이 자연에 몰입돼 가는 과정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한성기 시인이 ‘둑길의 시인’으로 불리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조용한 시골 둑길을 사색하듯 걸으며 심상을 품고 이를 고뇌해 시를 쓴 그는 자연을 추구하는 소박한 시인으로 감동을 전하는 작품을 여럿 남겼다.

한성기 1923 ~ 1984년

대표 작품 <산에서>, <낙향 이후>, <실향>, <구암리> 등
아버지 한탁영(韓鐸英)과 어머니 이만길(李萬吉) 사이에서 태어났다. 1942년 함흥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충청남도로 발령을 받았다. 1944년 일본 문부성에서 시행하는 고등학교 교사자격 검정시험 서예과(書藝科)에 합격했으며, 1947년부터 대전사범학교에서 15년간 근무했다. 한때 신병으로 입산한 일이 있으나, 계속 대전 근교에 살면서 시 창작에 전념했다. 충청남도문화상, 한국문학상, 조연현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