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농사’라는 새로운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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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시 봉남면 오동마을. 가을이 오면 이곳은 온통 금빛으로 넘실댄다. 들녘마다 고개 숙인 벼이삭이 바람결에 출렁이고, 밭에는 단단히 여문 콩, 고구마, 감자 등이 줄지어 수확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이른 아침부터 농부들의 분주한 발걸음이 논과 밭을 채운다.
일 년 중 가장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차정환 씨는 올해로 5년 차 농부로, 이제는 이런 농번기의 분주함이 조금은 익숙하다. 정환 씨가 농사일에 처음 뛰어들게 된 건 자의 반, 타의 반이었다. 어릴 때부터 운동이 좋아 체육대학교로 진학을 준비하고 있던 중 손목과 인대에 부상이 생기면서 인생의 새로운 진로를 찾아야 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농사였다. “아버지께서 농사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시더라고요. 농업의 미래를 보셨던 거죠. 그 시기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할머니가 시골에 혼자 남게 되었어요. 그래서 시골로 가야겠다,라는 생각으로 할머니가 계신 김제로 오게 되었어요.”
오래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농부가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당장 자격증 공부를 시작해 일 년에 6개의 자격증을 땄다. 농업학교에서 주최하는 경진대회에도 꼬박꼬박 출전하며 실력을 쌓았다. 그러나 농사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부모님이 농사를 지었던 것도 아니었기에 모든 것을 스스로 해내야 했다. “농지를 임대하는 것부터가 문제였어요. 돈이 없었으니까요. 또, 농지를 임대하고 나면 농사 지을 기계가 필요하잖아요. 그런데 트랙터 한 대 값이 만만치 않거든요. 그래서 마을에서 가장 농사를 크게 짓는 형님을 찾아갔어요. 농사일을 도와드릴 테니 기계를 빌려달라고 했죠. 그래서 일을 다 도운 뒤에 남는 시간에 제 농사를 조금씩 하고, 그런 식으로 시작을 했어요.”
- 결실을 맺은 땀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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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해 수익은 고작 350만 원. 한 달로 따지면 30만 원도 안 되는 수입이었다. 포기할 법도 했지만, 자신이 일군 논밭을 바라보면 쉽게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래서 딱 5년만 버텨보기로 했다. 400평 밭을 얻어 벼와 콩, 감자, 고구마, 감 등 힘이 닿는 대로 농사를 지었다. 새벽에는 손해평가사로 일하며 피해 농가를 찾아다녔고, 틈틈이 트랙터 작업이 필요한 곳에 나가 일당도 벌었다. 오후에는 운동 실력을 살려 동네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필라테스 강사로 수업을 했다. “내 농사를 짓기 위한 자본금이 필요했으니까 닥치는 대로 일을 했어요. 정말 하루하루 앞만 보고 살았죠. 3년까지는 그랬던 것 같아요. 그리고 작년에 드디어 트랙터를 사게 됐어요.” 이후 농지를 공격적으로 늘려나갔다. 농사 규모가 커지면서 수익도 점차 안정되기 시작했다. 5년만 버텨보자, 했던 다짐이 5년 차에 드디어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그는 작년부터 오랫동안 꿈꿔온 일을 시작했다. 바로 버섯 농사다. “사실 버섯 농사를 하려고 시골에 온 거거든요. 그런데 초기 자본이 너무 많이 들어서 조금 미뤄뒀죠. 제가 농사 외에 여러 가지 일을 병행했던 이유는, 결국 제가 하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이었어요.” 현재 그의 농장에서 기르는 작물은 세 가지다. 벼와 콩과 목이버섯. 작물의 종류를 줄이는 대신 품질 향상에 집중했다. 덕분에 지난 한 해 농사는 ‘풍년’이라 부를 만큼 성공적이었다. 이제 그는 이웃 선배들에게도 당당히 인정받는 농부가 됐다. 바쁠 때는 서로의 손길을 품앗이하며, 오늘도 자신의 꿈을 일구어가고 있다.
- ‘최선’이 나의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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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매년 초, 자신의 목표를 세우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1년치 계획을 치밀하게 세운다. 올해 초에는 자신이 직접 재배한 농작물을 상품화하기로 결심했고, 10개월이 지난 지금, 그의 콩으로 만들어진 두부칩과 두유가 출시되어 절찬리에 판매되고 있다. “저는 계획을 세우면 어떻게든 이뤄요. 실패는 없어요. 플랜을 A부터 Z까지 세우거든요. 이렇게 계획을 철저하게 세우는 이유는 세상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에요. 하나가 삐끗하더라도 좌절하거나 고민하지 않고 빠르게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야 제가 목표한 것들을 이룰 수 있잖아요.” 정환 씨는 계획을 하나씩 이뤄가고 있으면서도 ‘성취감’이나 ‘희열’ 같은 단어에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달려가야 할 길이 너무 많기에, 기뻐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꿈을 향해 질주하는 그를 멈춰 세우는 유일한 존재는 ‘날씨’다. 지난 10월, 유난히 길었던 가을장마에 구획을 나눠 방재 계획을 세우는 등 온갖 대응책을 펼쳤지만, 쏟아지는 가을비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렇지만 아쉬움은 없다. “정말 별짓을 다 해봤는데, 자연을 이길 수는 없더라고요. 그런데 아쉬움은 없어요.
할 수 있는 건 정말 다 해봤거든요. 저는 매순간 후회 없이 살려고 해요. 과거를 돌아봤을 때 ‘그때 한번 해볼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요. 그런데 그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쉬고 싶고, 자고 싶고, 놀고 싶은 유혹을 뿌리쳐야 하거든요.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에요. ‘여기까지만 할까?’라는 생각이 아니라 ‘다 됐다’ 싶을 때까지 해요. ‘적당히’는 최선이 아니에요. 그 차이는 스스로가 알죠.”
정환 씨의 말에 따르면 농사는 정직한 일이다. 한 만큼 돌아오고, 잘못되어도 남을 탓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아, 탓할 게 하나 있다. 날씨요!” 정환 씨가 황금빛 들녘을 바라보았다. 결국, 세상은 뜻대로 되지 않지만, 그는 오늘도 자신의 뜻대로 살아간다. 자신만의 뚜렷한 꿈을 향해 걸어가는 청년의 발걸음은 당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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