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water 水토리 : 한국수자원공사 웹진 2024. MAY VOL.674

K-water 水토리

본사 대전 이전 50주년 기념 시리즈
온 힘으로 만든 대전과의 인연

올해는 한국수자원공사가 서울을 떠나 대전으로 이전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74년 대전 이전 당시 근무했던 선배들을 만나 희미해가는 기억의 줄기들을 살펴봤다.

글·사진 K-water 홍보실




1편: 대구는 이미 만원… 대전으로 급선회
▶ 1974년 대전으로 이전한 신축 사옥 전경

지방 이전 최초의 공기업

한국수자원공사의 본사를 둘러싼 풍경은 소박하다. 도심에서 한 발 벗어나 있어 번잡함이 없다. 고요를 깨우는 것은 남북으로 뻗은 신탄진로 위의 차량 배기음뿐이다. 처음 찾는 이들은 이곳이 본사가 맞는지 의문을 품곤 한다. 당연히 공기업 본사는 도심 한복판에 있을 것이란 막연한 기대 가 어긋났기 때문이다. 왜 중심이 아닌 주변을 선택했을까? 1974년 10월 16일, 한국수자원공사는 공공기관 최초로 본사를 지방으로 이전했다. 위치는 대전 대덕군. 10월 15일 본사 건물이 준공됨에 따라 대한통운 차량에 이삿짐을 싣고 대대적인 행렬을 시작했다. 하루 만에 군사작전처럼 수송계획은 강행됐다. 서울 살림을 뒤로하고 대전으로 내려오는 발길은 무거웠다. 한국수자원공사는 1967년 창립 이래 서울 서대문구 정동에 있는 풍전빌딩을 임차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7년이라는 시간 동안 많은 직원이 가족을 꾸리고 삶의 토대를 다져온 서울이었다.

“70년대 서울이 비대해지자 인구 소산 정책에 따라 정부 투자기관을 지방으로 이전하기로 했지. 열심히 직장 생활해서 집안도 튼튼하게 꾸렸는데 내려가야 한다니까 직원들은 많이 동요하기 시작하더라고” _김순원 선배

“인구 소산 정책은 대통령이 결심한 것이어서 그때는 직원들 사이에 이에 대한 공감대가 없었지. 그냥 묵비권으로 따라가는 거라서 우리대로 섭섭할 수밖에 없었어. 당시 사장님 본인도 직원들 마음을 알았을 거야” _박동관 선배

1970년대에 지방 이전은 시대적 요구였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전되며 서울은 과밀화 상태였고, 정부는 이를 해결하고자 공공기관의 지방 이전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급팽창하는 강북의 인구를 분산시키기 위해 강남이 개발된 것도 이때였다.



대구로 가겠습니다

한국수자원공사의 지방 이전 운명이 결정된 것은 1973년 초봄이다. 당시 건설부 장관이 지방 이전 논의를 위해 산하기관장들을 소집했다. 주택공사와 토지개발공사, 도로공사 사장들을 접견실로 불렀다. 우리 공사 안경모 사장도 배석했다. 접견실에는 침묵이 흘렀다. 각 기관의 사장들은 직원 의견 조정이 힘들다며 어려움을 호소했다. 그러던 중 장관이 한국수자원공사의 의중을 물었고 안경모 사장의 발언은 뜻밖이었다. “대구로 가겠습니다” 전국 국영기업체 중 단연 선두로 지방 이전을 선언한 것이다. 당시 안경모 사장을 수행한 박동관 선배는 문틈으로 들리는 이야기에 깜짝 놀랐다.

“청천벽력이었지. 순간 이게 무슨 소린가... 머릿속이 하얘졌어. 안 사장이 성격 급한 양반이라 안동댐 사업을 하고 있으니 대구로 간다고 총대를 멘 거야” _박동관 선배

안경모 사장은 당시 총무과장이었던 박동관 선배에게 대구로 가서 사옥 건물을 물색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당시 대구시 인구가 100만 명을 넘겨 대구 시내에 우리 공사가 입주할 만한 면적의 건물이 없었다. 내부 사정도 녹록지 않았다. 대구 이전 소문이 빠르게 퍼지며 직원들의 원성은 커졌다. 지방 이전을 철회할 수 없다면 차라리 거리라도 가까운 대전으로 가게 해달라는 진정서까지 올라왔다.


“나는 속상하고 서운하긴 했어도 그냥 갈 수밖에 없다. 원망은 안 했어. 애들이 어려서 신당동에 가족들을 두고 혼자 내려가자니 마음이 착잡하긴 했지. 못 내려간다고 중간에 퇴직한 사람이 그렇게 많았어” _박동관 선배

“대구로 간다니까 직원들이 고개를 갸우뚱한단 말이야. 그때는 교통이 불편해서 서울서 대구까지 6시간 넘게 걸려. 대전으로 이전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지” _김순원 선배

종착지는 대전으로

결국, 대전으로 발길을 돌리기로 했다. 그러나 대전 이전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었다. 대구는박정희 대통령의 고향이었기에 대구 이전을 번복하기에는 부담이 컸다. 명분이 필요했다. 당시 김종필 민주공화당 총재와 김용태 원내총무가 마침 부여와 대전 출신이었다. 대전 이전의 당위성을 얻기 위해 공사 직원 중 부여와 대전 출신들을 모았고 정치권과 함께 치밀한 명분 쌓기에 돌입했다. 대전시와의 연합작전도 불사했다. 당시 심재홍 대전 시장에게 진정서를 보냈다. 지역 사회 발전을 목표로 정부 투자 기관 유치 작전을 펴달라는 내용이었다. 진정서를 보낸 이후 1973년 2월, 당시 박혁근 과장과 김인석 과장이 서둘러 새벽 열차를 타고 8시에 대전에 도착, 오전 11시에 심재홍 시장을 만났다. 박혁근 과장은 심재홍 시장과 6·25 당시 헌병학교 동기였다. 대전 이전을 위해 인맥까지 총동원한 것이다. 마침 김용태 원내총무가 제9대 국회의원 선거 합동 유세로 대전에 방문해 있었고, 김 총무를 만나 우리 공사를 대전에 유치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박 대통령은 처음에 대구를 고집하다가 대전 이전도 좋겠다고 수긍했어. 대전 이전이 힘을 얻게 된 거지.” _김순원 선배

이후 대구가 아닌 대전 이전 계획을 건설부에 알렸고, 청와대로부터 최종 승인을 허가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