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water 水토리 : 한국수자원공사 웹진 2024. JUNE VOL.675

K-water 水토리

본사 대전 이전 50주년 기념 시리즈
온 힘으로 만든 대전과의 인연

왜 대덕군이었을까? 이유는 3가지였다. 대구 이전 취소에 따른 지역갈등 예방과 전국 사업장 연결이 용이한 교통 조건, 대통령이 고속도로를 이용할 때 잘 보이는 위치라는 점이 이전지로 결정된 이유였다.

글 K-water 홍보실 박재현 사진 K-water 홍보실 제갈문필




2편: 집까지 담보삼아 교통 중심 대덕군으로

대전의 중심, 경암빌딩 이전 불발

본사 대전 이전은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한국수자원공사는 소양강댐을 비롯한 수자원 인프라의 성공적 건설로 한강의 기적을 이끌었고, 이는 서울 과밀화로 이어졌다. 결자해지라 했던가. 수도권 인구 소산 정책에 따라 우리 공사는 금싸라기 같은 서울 땅을 떠나야 했다. 본사 이전지로 최종 결정된 곳은 충남 대덕군 회덕면(現 대전광역시 대덕구 연축동)이다. 당시 회덕면은 대전 시내에서 떨어진 외곽으로 허허벌판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도심에서 멀어지려던 것은 아니다. 이전지가 회덕면으로 결정되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최초 검토한 이전지는 대전시청 인근 ‘경암빌딩’이었다. 중구 대흥동에 위치한 경암빌딩은 1970년에 준공된 10층짜리 건물로 대전 시내 최고층을 자랑했다. 그러나 경암빌딩으로의 이전 노력은 불발로 끝났다. 당시 조폐공사가 입주하는 등 대전의 중심으로 인기가 높아져 공간이 충분치 않았던 탓이다.

“ 지역갈등을 조장할 수 있다는 염려가 있었어. 대구 이전을 취소하고 대전 시내로 들어가면 대구에서 반발하겠지. 그래서 시내에서 벗어난 회덕면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어” _김순원 선배

대구 이전 취소에 따른 부담감도 도심을 떠나 회덕면으로 눈길을 돌리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본사를 대전 시내로 이전할 경우 대구에서 반발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고심 끝에 본사 이전지는 충남 대덕군 회덕면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대통령이 잘 보이는 남향으로

억지로 떠밀려 회덕면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회덕면은 전국 교통의 중심지였다. 당시 우리 공사는 전국에 걸친 국책사업을 담당하고 있어, 본사와 사업장 간의 소통과 교류가 중요했다. 경부선과 고속도로에 인접했던 회덕면은 지리적으로 큰 매력을 가졌던 셈이다. 결론적으로 본사 대전 이전은 전국의 사업장을 시‧공간적으로 압축하는 효과로 이어졌다. 남북으로 내달리는 차들을 풍경으로 1973년 12월 31일 사옥 건설이 시작됐다. 당초 사옥은 서향이었으나 안경모 사장의 지시로 남향으로 바뀌었다. 고속도로를 한눈에 조망하기 위해서다. 안경모 사장은 경부와 호남고속도로의 물동량을 볼 수 있어 우리나라 경제 동향을 살필 수 있다며 매우 흡족해했다. 반면 고속도로에서 바라보면 본사 사옥은 홀로 우뚝 솟아 있어 눈에 띄었다. 경부고속도로를 지날 때마다 대통령이 사옥을 한눈에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큰 간판도 설치했다.

“지금은 건물이랑 나무에 가려져 안 보이지만, 그때 2m 넘는 커다란 간판을 산비탈에 설치했어.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봐도 글자가 굉장하게 커서 잘 보였지.” _박동관 선배

“하루는 결재받으러 사장실에 들어갔는데 라디오에서 대통령이 대구에 간다는 뉴스가 나오는 거야. 그걸 듣고는 안경모 사장이 보이지도 않는데 고속도로 쪽으로 경례를 하시더라니까?” _김순원 선배

집문서를 담보로…
눈물겨운 첫 삽

사옥 이전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눈물겨운 사연이 있다. 사옥 부지 선정 후 당시 계약할 자금이 부족했다. 토지 주인들은 매매계약이 성립되지 않으면 농사 시기를 놓칠 수 있으니 확실하게 계약부터 할 것을 요구했다. 공사는 당장 대출을 받을 수 없는 처지였다. 당시 총무이사는 총무과장이었던 박동관 선배에게 자비로 계약금을 마련해달라고 부탁했다. 박 선배는 당연하게 받아들였다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신당동 집문서를 담보로 제공하고 주택은행 본점에서 대출받아 계약금을 지급했지. 아내와 미리 상의하지 않아 나중에 크게 오해를 받았어. 위험부담이야 당연 있었지만 총무과장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 생각했지. 생업을 목숨같이 여겼으니까” _박동관 선배

집문서를 담보로 첫 삽을 뜬지 10개월, 1974년 10월 15일 사옥은 무사히 준공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