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전한 지구
사치품을 넘어 문화재가
될지도 모르는 와인의 위기
글. 박상현 조선일보 사회정책부 기자
얼마 전, 프랑스 파리에서 소믈리에로 일하는 친구가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지난 4월의 어느 밤, 세계적 와인 산지인 프랑스 보르도 포도밭에서 수천 개의 불이 일렁이고 있었다. 박명(薄明)은 아니었다. 종대로 선 포도나무들 사이에서 반짝이는 불빛의 정체는 양초. 봄의 복판에 한겨울 서리가 닥치며 새싹이 얼어 죽을 까봐 양초의 온기로 냉해에 맞서는 모습이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이례적’이라 해석했던 4월 한파(寒波)가 이젠 일상이 됐고, 봄 냉해를 막으려 농부들은 매일 밤 드넓은 포도밭 곳곳 양초를 태우고 있다.
흔히 와인을 ‘천지인(天地人)의 결과물’이라고 한다. 하늘[天]은 일조량과 강수량을, 땅[地]은 포도의 양분인 토양 특성을, 사람[人]은 생산자를 뜻한다. 좋은 땅에서 충분한 볕을 쪼이며 자란 포도를 숙련 농부가 잘 빚어낼 때 최고의 와인이 만들어진다는 의미다. 볕이 불충분하거나 비가 억수 쏟아져 원재료 품질이 좋지 못한 해라도 뛰어난 양조 기술로 보완하면 훌륭한 와인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유명 일본 만화는 이런 와인을 ‘신의 물방울’이라고 불렀다.
와인 양조에서 가장 큰 변수는 ‘비’다. 강수량이 지나치게 많은 해엔 비구름대가 해를 자주 가리면서 포도가 충분히 볕을 받지 못한다. 열매가 수분을 많이 머금으므로 물 탄 듯 맛이 싱거워진다. 이런 해에 만들어진 와인은 물처럼 밍밍한 맛의 빈티지라는 뜻에서 ‘물빈’이라 불리며 상대적으로 싼값에 팔린다. 반면 볕이 좋았던 해는 ‘그레이트 빈티지’라 칭송받으며 사치품 대접을 받는다. 인간이 하늘은 컨트롤할 수 없기에 결국 하늘이 좋았던 해를 최고로 꼽는 것이다.
이러한 ‘신의 물방울’을 만나기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기후변화 탓이다. 기후변화란 수백, 수천 년간 인간이 적응해 살아왔던 계절적 패턴과 특성, 관성이 무너지는 것을 의미한다. 겨울은 춥고, 봄은 포근하며, 여름엔 볕과 비가 조화를 이뤄야만 가을에 눈부신 열매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온난화로 겨울이 따뜻해지면서 싹은 점점 더 일찍 고개를 내밀고 있다. 정작 쑥쑥 자라야 할 봄에는 수은주가 자주 영하로 떨어지면서 사망선고 받는 포도가 늘어나고 있다. 화이트 와인이 유명한 프랑스 부르고뉴 샤블리 지역의 경우 올 2~3월 이상고온 현상을 겪으며 예년보다 두세 달 이르게 새싹이 올라온 바람에 4월 서리 피해가 더 컸다.
결국 기후변화로 포도 생산량은 급감하고, 포도 품질도 장담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된다. 대형 포도밭의 경우 냉해를 피하려 하루 수천만 원을 들여 촛불을 피운다. 이런 비용이 와인 값에 반영되며 전반적으로 와인 가격이 오르게 된다. 와인 시장에서 기후변화가 야기한 인플레이션, 일종의 ‘기후플레이션(Climateflation)’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악조건을 뚫고도 좋은 와인을 빚어내는 생산자는 흔치 않기에, 유명 생산자의 와인 가격은 천정부지 치솟게 된다. 이미 한 병에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프랑스 부르고뉴 탑 생산자의 와인은 사치품을 넘어 박물관에 전시되는 문화재 대접을 받게 될지도 모르겠다.
소믈리에 친구는 요즘 부쩍 “좋은 와인을 실컷 마셔두라”는 말을 자주 한다. “앞으로 와인 생산량은 줄고 값은 오를 텐데 맛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기후변화로 어떤 날씨를 맞닥뜨릴지 예상할 수 없기 때문에 앞으로 만날 와인은 우리가 사랑했던 그 맛을 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지금 실컷 즐겨놔야만 추억 속에서라도 맛을 담아둘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와인뿐만 아니라 기후변화로 인해 우리 추억 속에서만 간직될 대상은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이 시대 수많은 신의 물방울이 머지않은 미래에는 ‘신의 눈물방울’로 불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