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빚어낸 보물, 경주의 변치 않는 풍경
경주 여행의 첫걸음은 언제나 그렇듯, 아득한 시간의 흔적을 더듬는 일에서 시작된다. 익숙하기에 무심코 지나쳤을지 모를 이 오래된 공간들은,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자신만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대릉원과 월성 사이에 자리한 계림은 ‘닭이 운 수풀’이라 불리는 곳으로 신라의 첫 숨결이 깃든 은밀한 숲이다. 한때 계림은 신라의 국호가 되기도 했으며,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의 탄생 설화를 품고 있다. 천 년 이상 생명을 이어 온 계림은 경주에서 가장 신비로운 기운을 뿜어내는 곳 중 한 곳이다. 계림은 한낮에도 어스름한 기운이 감돌 정도로 숲이 깊고 울창하다. 하늘을 향해 구불구불 힘차게 뻗은 고목들 사이로 부서지는 햇살을 맞으며 자박자박 느린 걸음으로 걷다 보면 수백 년 된 고목들이 하늘을 가린 채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때 마주한 계림의 모습은 마치 신화의 한복판에 들어선 듯한 착각에 빠지는데 그 재미가 쏠쏠하다.
계림 끝자락에 이르면 월정교를 마주한 교촌마을에 닿는다. 이 마을은 경주 최부자댁을 중심으로 향교와 전통 한옥이 어우러져 옛 모습을 지키고 있다. 경주 최부자댁으로 알려진 경주 최씨의 종가는 1700년경에 지어졌다고 전한다. 최부자댁은 조선시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마라’,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등 나눔과 상생의 철학이 고스란히 밴 공간이다. 교촌마을과 맞닿아 흐르는 남천에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한 월정교가 있다. 남천을 가로지르는 이 다리는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19년(760년)에 지었다고 한다. 월정교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 특히 양 끝에 자리한 문루는 궁궐 일부가 아닐까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시선을 압도한다. 하지만 화려함은 오래 가지 못한 채 조선시대에 유실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2018년 4월에 복원됐다.
월정교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해가 진 뒤에 드러난다. 은은한 조명이 다리와 문루를 비추면, 남천 위로 그 모습이 고스란히 반영돼 마치 신라의 밤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환상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누각에 서면 시원한 강바람과 함께 교촌마을의 야경이 한눈에 담긴다. 월정교의 복원은 단지 사라진 다리를 되살린 것을 넘어선다. 1,300년 전 신라인들이 즐겼을 풍경을 오늘날 우리도 함께 누릴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시공간을 초월하는 듯한 감동을 선사한다.
경주를 찾는 많은 여행객 가운데 학생을 빼놓을 수 없다. 경주를 가리켜 ‘대한민국 수학여행 1번지’라 부르는 말이 절대 헛말이 아니다. 학생들이 주로 방문하는 곳 가운데 대표적인 곳이 불국사와 석굴암이다. 자박자박 경내를 걸으며 빛바랜 단청과 문살을 바라보고 ‘고색창연함이란 이런 것이구나, 신라인들이 꿈꾸던 불국정토가 여기서 실현됐구나’ 하고 감탄한다. 구절양장 같은 구불구불한 길을 달려 이윽고 도착한 석굴암은 아쉽게도 사진을 촬영할 수 없다. 그래서 더 간절한 시선으로 본존불과 여러 부조물을 꼼꼼히 챙겨보게 된다. 흔히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고 하는데, 막상 사진을 남길 수 없으니 매의 눈으로 신라 예술의 극치를 한 땀 한 땀 기억 속에 저장한다.
계림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1

교촌마을

경상북도 경주시 교촌길 39-2

불국사

경상북도 경주시 불국로 385

석굴암

경상북도 경주시 석굴로 238

월정교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274

오늘의 감각으로 역사를 즐기다, 경주의 새로운 얼굴
경주는 과거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역사의 깊은 향기는 그대로 간직한 채, 오늘의 감각과 언어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국립경주박물관 내에 있는 신라천년서고가 바로 그런 곳이다. 원래 이곳은 국립경주박물관이 수장고로 사용하던 건물이었으나 2022년 도서관으로 리모델링했다. 국내외 전시 도록은 물론 신라, 경주와 관련된 다양한 도서가 비치돼 있다. 열람실은 전통 건축의 목구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천장이 인상적이다. 또한 지혜의 등불을 밝히듯 석등으로 공간을 마무리해 담백하면서도 상징적인 공간으로 재구성했다. 시끌벅적한 관광지를 잠시 벗어나, 차분하게 여행의 깊이를 더하고 싶을 때 신라천년서고는 최고의 쉼터이자 배움터가 되어줄 것이다.
대릉원 담장과 나란히 이어진 황리단길도 경주의 새로운 얼굴이다. 한옥 스타일의 카페나 식당, 편집숍, 사진관 등이 하나둘씩 문을 열면서 경주에서 가장 ‘핫’한 곳이 되었다. 5년 이상 황리단길을 지키고 있는 터줏대감들도 있다. 흑백사진을 전문으로 하는 ‘대릉원사진관’, 경주에서만 살 수 있는 선물을 파는 ‘배리삼릉공원’, 다보탑이 새겨진 10원 주화를 본떠 만든 ‘십원빵’, 고양이가 손님을 맞는 ‘고도 커피’ 등이 그곳이다. 무뚝뚝한 경상도 특유의 느낌에 곰살가운 면이 더해져 활기가 넘치는 골목이다.
우양미술관은 경주가 품은 또 다른 ‘새로움’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고미술과 유물이 가득한 도시에서 만나는 현대미술은 낯설면서도 신선한 자극을 준다. 국내외 거장들의 작품부터 실험적인 신진 작가들의 전시까지, 다채로운 현대미술의 향연은 여행자들에게 새로운 영감과 사유의 시간을 선물한다. 우양미술관은 전통적인 경주의 이미지와는 또 다른, 대담하고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여 왔다. 특히 APEC 경주 개최를 기념해 열리는 백남준 특별전 《Humanity in the Circuits》과 가나 출신 작가 아모아코 보아포의 아시아 최초 개인전 《I Have Been Here Before》을 11월 30일까지 진행한다.
경주 여행을 통해 새삼 느낀 게 있다. 과거는 현재의 풍경 속에서 되살아나고, 현재는 과거라는 든든한 뿌리 위에서 더욱 다채롭게 피어난다는 것이다. 경주는 박물관에 갇힌 과거형의 도시가 아니다. 오래된 가치를 지키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가는 ‘현재진행형’의 도시다. 이번 가을, 익숙하지만 매 순간 새로운 얼굴을 보여주는 경주에서, ‘오래된 새로움’을 발견해 보길 추천한다.
국립경주박물관

경상북도 경주시 일정로 186

황리단길

경상북도 경주시 포석로 1080

우양미술관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로 48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