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라는 새로운 도시에 도착하다
‘황리단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더욱 익숙한 ‘경주 황남동’에는 한옥 형태의 식당과 카페, 숍 등이 많다. 그곳에 위치한 ‘소소밀밀’은 글을 쓰는 김지혜 작가와 그림을 그리는 구서보 작가 부부의 작업실이자 그림책서점으로 10년째 황리단길을 지키고 있는 터줏대감이다.
그러나 ‘소소밀밀’이 있기 전까지 부부에게 경주는 아무런 연고가 없던 곳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듯 김 작가에게도 경주는 ‘여행지’ 그뿐이었다. “서울에서 여느 직장인들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었어요. 업무가 많아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그런 삶이요. 그러다 경주로 여행을 하게 됐는데, 첨성대 앞에서 강아지와 산책하는 사람들, 대릉원에서 러닝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 거죠. 각자 여유를 만끽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 삶은 어떤가?’ 생각해보게 됐어요. 전 아이에게 책 한 권 읽어줄 여유가 없었거든요.” 부부는 그 길로 서울의 모든 생활을 접고 경주로 내려왔다.
처음부터 책방을 열었던 건 아니다. 경주에서 2년간 회사생활을 하던 중 낯선 타향살이에 ‘다시 서울로 갈까?’ 고민하던 시기도 있었다. “연고가 없던 곳에서 생활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더라고요. 그런데 서울로 갈 생각을 하면 또 숨이 턱 막혔어요. 마치 휴가를 나왔다가 복귀를 앞둔 군인처럼요.” 아이와 함께 책 읽는 시간, 가족과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하는 시간 등 경주에서 비로소 느끼게 된 여유가 너무 소중했기 때문이다.
여태 치열하게 살았으니, ‘이제부터 우리가 진짜 하고 싶은 일들을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문을 연 것이 그림책서점 소소밀밀이다. 왜 하필 ‘그림책’이냐고 묻는다면 마음이 끌렸기 때문이란다. 동화, 동시가 주는 몽글몽글한 감정이 그의 마음도 건드렸기 때문일 테다.
내가 지키고 싶은 풍경
처음 책방 문을 열었을 땐 자신의 작업에 좀 더 집중할 계획이었으니, 손님은 하루에 세 명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책방 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이 손님이 몰렸다. 김 작가의 소박했던 마음과 달리 서점은 주말이면 하루 2천 명이 방문하는 관광지가 됐다. “서점에 머무는 동안만큼은 내면의 고요가 일어나길 바랐는데, 그저 소란했던 분위기로 기억될까 봐 걱정됐어요. 제가 원했던 서점의 풍경은 그런 것이 아니었거든요.” 소소밀밀은 책 선별부터 큐레이션, 포장까지 김 작가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벅찰 만큼 손님이 많을 때도 직원을 두지 않고 부부가 직접 모든 손님을 응대했다. 그만큼 온 마음을 기울인 공간이기에, 서점이 일회성으로 소비되는 것이 못내 아쉬웠을 것이다. 그래서 문턱을 높였다. 실내 사진 촬영을 금지하고,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방문객이 많을 때는 자체적으로 인원을 제한했다. 그럼에도 김 작가의 감도 높은 큐레이션 덕분에 손님들은 꾸준히 서점을 찾았다.
소소밀밀에는 주제별 서가나 신간 코너 등의 뚜렷한 분류가 없다. 그저 ‘아이들이 읽기 좋은 책’, ‘부모가 아이에게 읽어주면 좋은 책’, ‘어른을 위한 동화’ 등 독자의 다양한 눈높이를 고려하여 그의 안목대로 책을 선별·분류하고 있다. 또한, 한 책을 같은 자리에 오래 두지 않고 수시로 자리를 바꿔주고 있다. 책을 살아있는 생명처럼 돌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밖에 직접 쓰고 만든 책과 그들의 시선으로 그린 엽서를 선보이고 있다.
책으로 권하는 밀도 높은 따뜻함
서점 운영 10년 차. 기억에 남는 손님들도 많다. 오픈 때부터 해마다 조카의 생일 선물을 주문하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엄마 등에 업혀 왔던 아기가 이제 초등학생이 되어 혼자 서점을 찾아오기도 한단다. 어르신 손님도 적지 않다. “그림책은 다정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품고 있어요. 자신의 가장 순수했던 시절이 떠오르기도 하고, 사랑하는 어린 아이들이 겹쳐 보이기도 하죠. 특히 할아버지·할머니, 혹은 이모·삼촌뻘의 2~30대 손님들이 와서 손주나 조카가 생각난다며 책 추천을 부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는 세상을 선물한다는 마음으로 정성껏 책을 골라드린답니다.”
현재 서악동에서 운영 중인 2호점은 북카페로 운영 중이다. 책 판매를 하지 않는 대신 따뜻한 차 한 잔과 책을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이 밖에 그림책을 매개로 한 여러 가지 활동들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5월에는 서점 앞마당에 부스를 마련해 북페어를 진행했고, 세계적인 그림책 작가 다비드 칼리를 초청해 북토크를 진행하며 지역 문화의 거점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경주는 이야기가 풍부한 도시예요. 그 고유의 문화를 잘 살리면서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확장해 가며, 계속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쌓아가고 싶어요.”
프랑스 파리의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영국 런던의 해처드 서점처럼 외국에는 100년을 훌쩍 넘긴 서점들이 많다. 그곳은 지역민들의 오랜 기억이자 안식처로 남아 있다. 김지혜 작가는 소소밀밀 또한 그 긴 세월을 함께 걷고 싶다고 말했다. “할머니가 될 때까지도 서점을 지키고 싶어요. 지금 이곳을 찾는 아이들이 커서 결혼을 하고, 자녀를 데려오는 날을 상상해요. 더 나중에는 ‘아줌마, 제 손주예요!’라며 찾아오기도 하겠죠? 그때 따뜻하게 반겨주고 싶어요. 저는 언제나 이 자리에 있었다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