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을 품은 강, 문명을 품은 신
태초의 세상은 물로 가득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원초적 물을 ‘누(Nu)’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강이나 바다가 아닌 형태와 질서가 없는, 혼돈의 물이자 모든 가능성과 생명의 잠재력을 품은 심연이었다. 이 속에서 창조신 아툼(Atum)이 솟아올랐고, 그는 공기의 신 슈(Shu)와 습기의 여신 테프누트(Tefnut)를 낳았다. 그리고 이들이 하늘의 여신 누트(Nut)와 대지의 신 게브(Geb)를 탄생시켰고, 하늘과 땅이 분리되면서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세계가 펼쳐졌다. 이 과정에서 나일강이 탄생했고, 나일강의 신성한 흐름을 따라 대지가 생명을 얻었다.
게브와 누트 사이에서 태어난 오시리스(Osiris)는 이집트 신화에서 가장 인간적인 신이었다. 그는 풍요와 농업, 죽음과 부활을 관장하였으며, 법률과 문명을 정비하여 질서 있는 사회를 구축했다. 또한, 오시리스는 이집트인들에게 평화, 음악, 기쁨 속에서 사는 법을 가르치고, 포도주를 얻기 위해 포도나무를 심어야 한다는 법을 알려주었다. 그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메마른 땅에서 초록빛 싹이 돋아나고, 사람들은 풍성하게 수확을 즐길 수 있었다. 이집트는 그의 통치 아래 번영과 평화를 누렸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이 번영을 질투한 자가 있었으니, 그의 남동생, 사막과 혼돈의 신 세트(Set)였다. 세트는 오시리스를 속여 화려한 관 속에 가둔 후 나일강 깊이 던져 버렸다. 오시리스의 죽음과 동시에 나라는 황폐해졌다. 강가는 시들고, 밭은 잿빛으로 변했다. 오시리스 아내 이시스는 하늘과 땅, 강과 사막을 헤매며 그를 찾았다. 이시스는 조각난 오시리스의 몸을 이어 붙이고 숨을 불어넣었다. 오시리스는 완전한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했지만, 기적적으로 나일강의 범람과 함께 다시 생명을 깨우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