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갈지도

내려놓기 좋은 시간
장흥

자주 앉고 싶고 느려지고 싶고 멀리 바라보고
싶었다. 바쁜 일상을 보내다 온 걸
안다는 듯 곳곳에서 몸도 마음도 이완케 했다.
이런 곳이라면 며칠도 더 머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글  /  📷사진. 박재현 소설가

보림사
거꾸로 흐르는 시간

여행은 특별한 장소에 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특별한 과거의 시간 속으로 가는 것이기도 하다. 보림사가 그런 곳이다. 860년에 지어졌으니 그 세월을 어떻게 다 설명할 수 있을까. 물론 6·25 전쟁 때 대부분의 건물은 무너지고 그 후 복원한 것이나, 일주문과 천왕문 그리고 석탑과 석등은 그대로다. 석탑과 석등은 설계자가 의도한 듯 저 멀리 외호문에서부터 정확히 눈에 들어온다. 고요한 이 절에서 절로 겸손해지는 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였기 때문이다. 내가 얼마나 작은지 새삼 깨닫게 된다. 보림사를 한 바퀴 돌아 본 뒤엔 큰 나무 아래에 앉아 쉬어 가도 좋다. 나무가 큰 만큼 그늘도 너르다. 결국 우리가 여행에서 마주하고 싶은 건 이런 쉼이 아닐까.

보림사의 핵은 석탑과 석등이다. 국가유산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미가 돋보인다. 모두 온전하게 남아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
절 뒤쪽으로는 비자나무 숲과 300살이 넘는 나무들이 많아 산책하며 과거로 돌아가기 좋다.

우드랜드
나무에게 하는 말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장흥에선 나무가 특별한가 보다. 편백숲 우드랜드는 편백나무를 한없이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자꾸만 숨을 깊게 들이마시게 만든다. 들숨에 편백 향이 가슴에 가득 차니 기분이 환해질 수밖에 없다. 숲이 워낙 우거져 대부분 그늘이다. 나무 사이 틈으로 조금씩 들어오는 볕이 반가울 정도. 걷기도 좋고 생각 없이 멍하게 있기도 좋다. 벤치에 앉아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를 따라 마음도 조금씩 일렁인다. 언젠가 기술이 발전해 나무와 소통할 날을 꿈꾸곤 한다. 나무는 과거를 다 알고 있을 테니까. 할 말도 많지 않을까. 나도 말할 것이다. 내어 주기만 하는 너의 생을 닮고 싶다고.

우드랜드에는 산책길뿐만 아니라 식물원, 폭포, 편백소금집, 전시관 등이 있고 산림 치유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라 자연을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 친환경 소재로 만든 숙박 시설도 있어 숲에서 특별한 하룻밤을 보내기에도 좋다.

선학동마을
나그네가 되기 좋은 동네

장흥은 유독 많은 문인을 배출했다. 산과 들과 바다가 다 수려해서 그런 게 아닐까 추측해 본다. 선학동 마을은 이 셋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장흥 출생 작가 이청준의 소설 『선학동 나그네』의 배경이기도 하다. 봄에는 유채꽃, 가을에는 메밀꽃이 온 마을을 뒤덮어 마을은 계절마다 윤이 난다. 마을 언덕배기에 위치한 정자에서는 득량만 바다와 마을 전체를 아울러서 볼 수 있다. 정자의 모서리가 마치 액자의 프레임처럼 풍경을 포장한다. 길 곳곳에는 이청준의 작품을 설명한 게시판이 있어 그의 작품에 울고 웃은 독자라면 그때의 감상이 피어오를 것이다. 마을의 정보를 묻는 여행자에게 시원한 거라도 한 잔하고 가라는 주민들의 인심은 덤이다.

선학동마을에서는 높은 곳으로 갈수록 산과 들과 바다가 잘 보인다. 가을에는 10만 여m2 대지 위에 메밀꽃이 피어 동화 같은 순간을 만끽할 수 있다. 10월에 메밀꽃 축제가 열리니 놓치지 말자. 근처에 소설가 이청준 생가가 있어 함께 둘러보기 좋다.

  • © 장흥군청

소등섬
더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들

작을수록 아름다운 존재가 있다. 자그마한 소등섬은 멀리서 봤을 때 더 멋이 난다. 거북이 등에 꽃이 핀 것처럼 소나무들이 힘차게 솟아 있다. 이 섬은 뭍과 길이 연결돼 있어 걸어서 갈 수 있다. 다만 늘 갈 수 있는 건 아니다. 하루에 두세 번, 물이 빠질 때야 길이 드러난다. 기다려야 만날 수 있으니 소중해질 수밖에 없다. 해가 질 때쯤 연분홍빛 노을과 겹쳐지는 섬의 자태를 담아 가자. 내 안에 작은 섬처럼 띄워져 있는 그리운 이가 떠오를지도 모를 일이다.

먼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간 남편을 위해 호롱불을 켜 놓고, 그 불빛을 보고 무사히 귀환하기를 빌었다 하여 소등섬이라 불린다. 일몰보다는 일출이 더 아름답고 사진으로 남기기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