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人지도
술 한잔에
희로애락을 담다
천 년 역사의 경주에서 우리 전통주 막걸리를 빚어내는 경주식회사.
‘경주식’이라는 이름은 김민영 대표의 고향인 ‘경주’의 색깔로 술을 만들겠다는 뜻이다.
경주 황오동 작은 양조장에서 빚어내는 그의 막걸리에는 인간사 희로애락에 닿기를 바라는 신념이 담겨있다.
경주식회사 김민영 대표 / 신가은 이사
📝글. 김은하 / 📷사진. 황지현
청년들이 일으킨 전통주의 반란
사람들은 왜 술을 마실까? 김민영 대표의 경주식회사는 이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됐다. 왜 하필 막걸리냐고 묻는다면 외로울 때 마셨던 막걸리 덕분에 술의 맛에 눈을 떴기 때문이란다. 처음에는 할머니가 쓰던 항아리에 쌀, 물, 누룩을 넣어 막걸리를 빚어 보았다. 그렇게 점차 술 담는 항아리가 늘어나게 되었고, 여기에 신가은 이사가 합세해 ‘경주만의 술’을 만들어 보기로 한 것이 경주식회사의 출발이었다. “‘경주식’은 한자로 놀랄 경(驚), 술 주(酒), 밥 식(食)이에요. ‘깜짝 놀랄 술과 음식’이라는 뜻을 담고 있죠. 동시에 ‘경주’식이라 읽을 수 있는데, 이 지역만의 방식이 무엇인지 보여주자는 의미도 숨겨 두었어요.”
술을 빚을 때는 원재료가 가장 중요하다. 쌀의 품종이나 물맛에 따라 맛과 풍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 대표는 지역 고유의 식재료로 진짜배기 ‘경주의 맛’을 만들어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가 주목한 재료는 체리다. “경주에서 체리를 재배한 지 벌써 100년이 넘었어요. 그런데 아직도 잘 모르는 분들이 많아요. 우리 지역 고유의 맛을 극대화하기 위해 체리로 술을 빚어야겠다고 생각했죠. 자연스럽게 ‘경주 체리’에 대해 알릴 수 있겠다 싶었거든요.” 이들이 체리로 빚어낸 막걸리는 청량하다. 전통주이면서도 마치 샴페인 같아 가볍게 즐기기 좋다. 하지만 아쉽게도 소량씩만 생산하고 있다. 그 이유는 지역을 대표하는 만큼 최상의 맛을 선보여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실 맛이 가장 절정에 오른, 흔히 말해 ‘제철’이라 표현하는 오뉴월에 수확한 체리로만 술을 빚고 있다. 이 시기를 놓치면 일 년을 다시 기다려야 하기에 경주식회사가 선보이는 경주의 맛이 궁금하다면 꼭 시기를 잘 맞춰 찾아야 한단다.
우리식대로 이어가는 전통
원재료 외에도 발효할 때의 온도, 술의 가공법, 재료의 비율이나 담금의 횟수 등 술의 맛을 좌우하는 요소들은 많다. 그리고 이것들을 모두 아우르는 것이 바로 양조사의 마음이다. 김 대표는 일단 상상을 한단다. 뚜껑을 연 순간 퍼지는 향기와 한 모금 마실 때의 감정, 목으로 넘어갈 때의 무게 등 마치 자신이 막걸리를 마신다고 생각하며 발효부터 담금까지 전 과정에 정성을 쏟는다.
그런 그에게 한 가지 철칙이 있다면 전통을 고수하는 것이다. 아무리 현대적으로 풀어낸 ‘요즘’ 막걸리일지라도 만들어내는 방식은 본래의 방식을 지켜나가고 있다. 경주식회사에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는 항아리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옛 문화이기 때문이에요. 물론 상업적인 양조에 적합하지 않은 방식인 것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누군가는 전통의 맥을 이어 나가야죠. 항아리에서 술을 빚기 위해서는 그만큼 오랜 시간과 정성을 쏟아야 하지만 그렇게 역사를 지켜나가는 것이 저희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누군가에게는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이러한 작은 차이가 경주의 전통과 색깔, 그리고 개성을 더욱 진하게 만들어 준다. 경주식회사는 자신들의 제품을 알리기 위해 화려한 광고나 마케팅에 돈을 쏟지 않는다. 전국으로 뻗어가기에 앞서, 지역 사람들에게 알리는 게 먼저라는 생각에서다. “경주 사람도 모르는 술이 과연 지역을 대표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 지역 사람들에게 사랑받는게 먼저라는 생각을 했어요. 아무나 붙잡고 ‘경주에서 꼭 먹어야 할 게 뭐야?’라고 물었을 때 ‘경주식회사의 막걸리’라는 대답이 나오는 것이 첫 번째 목표예요.”
삶을 노래하는 한잔
이들이 생각하는 술의 힘은 무엇일까.
신 이사는 인간의 감정에 가장 가까이 닿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술’이라고 말했다. 덧붙여 사람들과 주고받는 한잔 속에서 삶의 태도도 곱씹어 볼 수 있단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술을 찾아요. 이 한잔에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있는 거죠. 그래서 술은 삶과 닮았다고 생각해요. ‘부어라 마셔라’ 하듯 스스로를 불태우지 않고, 삶의 모든 시간을 천천히 음미하길 바라는 마음이에요.”
그런 마음에서 출시한 것이 ‘희로애락’ 시리즈다. 체리나 신라봉 등 제철 과일을 활용해 가볍게 풀어낸 막걸리에는 기쁨(喜)을 담고, 쌉싸름한 끝 맛이 마치 인생의 쓴맛처럼 느껴지는 찰보리 막걸리에는 슬픔(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나머지 두 가지 감정을 담은 막걸리도 연구 중이다.경주식회사의 목표는 지역의 새로운 문화를 이끄는 것이다. 얼마 전 오픈한 막걸리 하우스에 ‘깁모어막걸리’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전통주의 문턱을 없애기 위해서다. 이곳에서는 누구나 ‘한 잔 더’ 또는 ‘깁 모어!(Give more)’를 외치게 된다. 가장 한국적인 도시 경주에서 이토록 유쾌한 전통주라니. ‘경주’라는 도시는 우리나라를 넘어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도시로 인식되고 있다. 여기에 한 발 더 도약할 중요한 시기다. 경주식회사의 술 한잔이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