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갈지도

계절의 힘
경주

가을이다. 이상하게 나를 더 들여다보게 되는 계절이다. 그게 싫지가 않다.
나를 안다는 건 근사한 일이니까. 경주는 이 계절 속으로 나를 더 빠지게 만들어 주었다.
마음 밭에 쌓인 안개가 조금씩 걷혔다.

📝글 / 📷사진. 박재현 소설가

첨성대

계절이 주는 선물

별을 보기 위해 지은 천문대가 이렇게 앙증맞아도 될까. 예쁘게 쌓아 올린 돌탑 같기도 한 첨성대는 별을 보고 나라의 길흉을 점치기 위해 만들어졌다. 아래는 네모지고 위가 둥근 모양은 땅과 하늘을 형상화한 것이다. 사실 이 계절엔 첨성대보다 그를 둘러싼 주변 식물들을 보기 위해 찾는 이가 많다. 특히 핑크뮬리가 가장 눈을 끈다. 워낙 화사해 그 자체가 포토존이다. 핑크뮬리는 벼과 식물인데 실체가 명확하지 않고 뿌옇게 보이는 게 무언가 숨기고 싶은 우리의 마음과 닮은 데가 있다. 더 아득하고 곱게 다가오는 이유다. 다른 한쪽엔 팜파스그라스가 한가득 모여 있다. 갈대를 닮은, 남미에서 온 이 식물 역시 가을을 더욱 깊게 그린다. 저 멀리서 가을볕에 촘촘한 잎이 자세히 드러날 때 새삼 ‘아, 가을이구나’, 하는 말이 나온다.

가을의 첨성대는 꽃으로 물든다. 핑크뮬리, 팜파스그라스 외에도 국화, 백일홍, 천일홍, 맨드라미 등의 꽃이 밭으로 형성돼 있어 함께 구경하기 좋다.

불국사

신라인들의 꿈

불국사는 늘 같은 자리에 있는데 올 때마다 풍경이 다르게 느껴진다. 갈수록 불국사를 찾는 외국인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 간혹 외국인들에게 권하는 관광 필수 코스 중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곳도 있지만, 불국사만큼은 떳떳하게 자랑하고 싶다. 이름부터 압권이다. ‘부처님의 나라’라니. 신라인들의 꿈을 우린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이곳을 정갈한 마음으로 오갔을 신라인들을 상상해 본다. 청운교와 백운교를 천천히 올라 눈앞에 나오는 석가탑과 다보탑을 보며 어떤 감상에 젖었을까. 대웅전에 들어가서는 가족들의 안녕을 빌었겠지. 그 옆의 극락전도 빠뜨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극락은 무엇이었을까.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극락은 크나큰 미지의 영역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와 불국사를 거니는 작은 여유가 아닐까.

불국사에 들렀다면 연못 반야연지도 놓치지 말자. 해탈교 건너편에서 바라본 반야연지와 해탈교의 풍경이 남다르다. 단풍이 절정일 때 권한다.

대릉원

왕이 주는 평화

무덤 앞을 걸으면서도 이렇게 평화롭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왕이 주는 안식일까. 크나큰 왕릉을 보노라면 마음이 넉넉해질 수밖에 없다. 그 크기에는 백성들의 존경이 담겨 있다 믿는다. 고개를 조금만 들어 보면 하늘과 무덤만이 시야에 들어온다. 눈을 편안하게 하는 푸른색이 잠시나마 아파트 숲을 잊게 한다. 왕릉을 더 빛내 주는 건 이를 둘러싼 나무들이다. 아무렇게나 무성하게 있는 게 아니라 군데군데 적절한 위치에 있어 운치를 더해 준다. 봄에는 벚꽃, 가을에는 단풍 명소로도 유명하다. 왕릉을 모두 돌아본 뒤 나와 다른 장소로 이동하기 전에 대릉원 바깥의 돌담길도 거닐어 보자. 키 낮은 돌담 아래에서 낙엽을 밟는 낭만은 쉽게 찾아오진 않으니까.

황남대총 뒤쪽에 큰 목련 나무가 있다. 능과 능 사이에 있어서 포토존으로 통한다. 주변 한복 대여점에서 신라시대의 한복을 빌려 입고 사진을 찍어 보거나, 능 뷰 카페를 찾아 커피를 마시며 통창 너머의 대릉원을 마음껏 감상해도 좋다.

동궁과 월지

연못이 그린 그림

이곳은 신라 왕궁의 별궁 터다. 동궁은 신라의 왕자들이 기거하는 곳이었고, 월지는 달이 비치는 연못을 뜻했다. 이곳에 도착하면 자연스럽게 연못을 천천히 돌게 된다. 서늘한 공기와 약간의 볕에 기분 좋게 흙길을 걸으며 왕자의 기분을 어림잡아 보자. 아무래도 이곳의 핵은 연못이다. 서 있는 곳에 따라 분위기가 조금씩 다르다. 작은 섬도 있고 조용히 떠 있는 식물도 있어 골라 보는 재미가 있다. 하늘과 구름을 담고 있는 연못의 반영이 자꾸 시선을 빼앗는다. 저녁이 되면 조명이 켜지면서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고즈넉한 야경에 사람들이 연신 카메라를 든다. 당시에도 이곳이 최고의 야경 명소였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조명은 없었겠지만 그보다 더 멋을 잘 부리는 달이 있었으니까.

동궁과 월지는 야경이 이름난 만큼 주로 어둠이 진 뒤 찾는 사람들이 많지만, 해가 지기 전에 미리 가있길 권한다.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에 따라 연못의 풍경도 바뀌니까. 야경만큼 노을이 섞인 풍경도 훌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