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적 사유
채움과 비움의
균형
📝글. 김신식 감정사회학자
채움의 관점에서 본 인생
미니멀리즘, 심플하게 사는 법, 생각 버리는 연습, 감정 정리, 뇌 청소법 등 줄이고 비우는 태도를 중시하는 자기계발 문화가 오랜기간 사람들의 관심과 호응을 얻고 있다. 나 또한 그 같은 사회적 흐름을 따라가며 좋은 점을 취해왔다. 다만 상대적으로 ‘채움’ 이 삶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은 가치로 소외받고 있진 않나 곱씹게 되긴 했다. 그런고로 ‘채움’의 관점에서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려 한다. 삶을 채움 대 비움의 대결 구도로 설정한 채, 한쪽의 우위를 내세우는 시도는 아니다. ‘비움’과 ‘채움’이란 태도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말하고자 한다.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다섯 가지 요소를 채우고자 노력한다.
첫째는 배움이다. 인간은 공부를 통해 지식을 접하며 성장을 꾀한다. 내면이 자라기 위해선 학습하는 자세로 하루하루를 채워나가야 한다는 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둘째는 돈이다. 인간은 의식주의 안정을 위해 날마다 경제활동을 한다. 물론 ‘돈! 돈!돈!’ 거리며 돈에만 매몰된 인생은 좋지 않다. 하지만 ‘곳간에서 인심 난다’라는 옛말처럼 돈을 기반으로 한 어느 정도의 물질적 안정 속에서 타인을 생각하는 여유가 채워지는 게 사실이다.
셋째는 취향이다. 속된 말로 ‘먹고사는 수준’을 유지하기 시작하면, 인간은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 선보이고 싶은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신경을 쏟는다. ‘이게 바로 나야!’ 라며 드러낼 수 있는 라이프스타일이 무엇인지 탐색하는 일로 하루를 보낸다. 이른바 ‘취향의 발견’이다.
넷째는 관계다. 탁월한 생각, 아름다운 물건이 있어도 다른 존재가 반응하지 않으면 빛이 바랜다. 인간은 타자와 교류하면서 관계라는 가치를 삶에 채워나간다. 데이트 어플에 접속해 연애하고 싶은 사람을 찾아 나서고, 홀로 뛸 수도 있지만 러닝크루에 가입해 활동해보고,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핫플’에 방문한 사진을 올리거나 타인의 일상 사진을 들여다보기까지…. 이러한 경험을 하는 동안 타자와의 지나친 연결에 진저리치면서도, ‘나’의 삶을 이루는 데 타자와 관계 맺는 일도 무시할 수 없다는 걸 안다.
다섯째는 감정이다. 살면서 배움을 채우고 돈을 채우며 취향을 채우고 관계를 채워가는 까닭은, 결국 인간은 특정한 감정을 채우고 싶은 동물이기 때문이리라. 우리는 어린시절부터 노년기까지 삶에서 행복을 채우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 익히 보고 듣고 느껴왔다. 그리곤 각자가 원하는 행복의 상을 떠올리며 본인이 꿈꿔온 행복의 순간이 찾아 오길 기대한다.
근데 인간이란 존재는 참으로 신기해서 기쁨과 설렘 같은 감정이 내 삶에 채워지길 바라면서, 반대 측면의 감정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가령 인간은 행복함 속에 하루하루를 살아가길 바라면서도 막상 그런 삶의 모드가 지속되면 ‘내가 늘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머지 않아 안 좋은 일이 일어나진 않을까?’ 스스로 괴롭힌다. 극도의 행복감을 느끼는 동안, 극단의 불안감도 느끼는 심적 상태를 ‘헤도마조히즘(Hedomasochism)’이라고 한다. 그러한 상태는 인간을 위태위태한 지경으로 내몬다. 한편으론 좋은 일 다음엔 좋지 않은 일이 반드시 따라오기 마련이라며, 앞날을 신중하게 내다볼 수 있어 다행이라는 안도감을 선사하기도 한다.
조화만큼이나
불화하는 태도로 나의 삶을 채워나간다는 것은
인간에게 허락된 삶의 묘미이자 예상치 못한
성취에 다다르는 생활방식이다
비울수록 채워지는 아이러니
응당 비워내면 좋다고 인식되어온 감정에 이끌림을 느끼며, 그런 감정이 채워져 있는 상태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삶. 이처럼 인간은 채움과 비움을 두고 아이러니를 경험한다. 특히 우리는 채움과 비움이 엮여있는 관계성 아래, ‘비움도 채움이다’라는 말을 경험하기도 한다. 단적인 예로 ‘포만감’이 있다. 포만감이란 배부른 상태에서 마음속에 채워지는 만족감을 말한다.
나에겐 같이 사는 사람이 있다. 항상 배달 음식에 절어있던 나였는데 요리 잘하고 소식하는 애인을 만나 먹는 재미를 새로이 느끼게 됐다. 그동안 가까이하지 않은 향신료나 소스, 진귀한 채소 등을 접하게 되었고 특히나 땅콩버터의 맛에 빠졌다. 그가 땅콩버터를 호밀빵에 발라 오이 샌드위치를 처음 만들어 주었을 때가 떠오른다. 그가 말했다. “요렇게 한쪽만 먹어도 배부르죠? 땅콩버터 이게 은근히 포만감을 준다니까요.” 그 뒤부터 커다란 샌드위치 두 개는 먹어야 성에 찼던 본래의 내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졌다. 나는 땅콩버터를 바른 샌드위치 한 쪽만 먹을 때마다 ‘아니 이렇게 먹어도 배가 차네’ 하며 기막히다는 듯 웃고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 먹성의 기준치에서 모자라 빈 구석이 생겨도 예전에 느낀 만족감이 변함없이 채워졌다는데 기쁘게 수긍한다는 표현이었다.
일의 경계 : 어디까지 채워야 할까
장안의 화제였던 넷플릭스 시리즈 <흑백요리사>를 보며 ‘채움의 범위’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음식을 완성하고 난 뒤 일일이 설거지와 뒷정리를 하는 셰프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비록 촬영 세트장을 따로 정리하는 담당자들이 있었겠지만, 요리 후 뒷정리를 직접 말끔히 하는 모습에서 요리하는 사람으로서 자기 주방에 대한 책임감을 보여주는 듯해 호감을 느꼈다. 비슷한 맥락으로서 가수 성시경이 한 예능에서 한 말이 떠올랐다. ‘설거지까지가 요리입니다’. 음식을 해 먹을 때마다 갈등이 빚어진다는 한 커플의 말에 해결책으로 제시한 말이었다. <흑백요리사>에서 음식을 완성한 뒤 일일이 주방 도구를 닦는 셰프들의 모습을 재차떠올렸다. 이 사람들은 설거지까지 요리라고 생각하는구나, 싶었다. <흑백요리사>에 출연한 셰프와 성시경은 요리하면 으레 생각하는 일의 범위에서 한 뼘 더 넓은 생각을 하고선 실천했다. 그로 말미암아 요리의 정의를 넓힌 셈이다.
이것은 비단 요리에만 해당되는 깨달음일까. 우리는 업계가 권하는 기준, 이 바닥에서 통용되어온 기준을 채우는 것을 우선적인 목표로 삼는다. 하지만 뛰어난 사람은 이에 머무르지 않는다. 업계의 기준에서 탈피 하는 시도, 기준에 저항하는 시도를 한다. 그 끝에 자기 자신이 속한 분야에서 고인물처럼 여겨온 일의 속성에서 벗어나 ‘내가 하는 일이란 무엇인가?’, ‘내가 하는 일은 어디까지가 완성인가?’ 물음을 던지곤 자신이 맡은 일의 의미와 정의를 확장해나간다.
균형을 위해 용기를 채워나가는 삶
끝으로 비움과 채움을 통해 삶의 균형을 맞춰나가려는 이들에게 권장하고 싶은 태도에 대해 말하고 싶다. 밴드 새소년의 리드 보컬이자 싱어송라이터인 황소윤은 균형감각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자신의 노래 중 <Wings>라는 곡은 사람들의 귓가에 말랑말랑하게 들리는 노래지만, 뮤직비디오는 무시무시한 호러로 연출했다고. 자신에겐 이같은 ‘이질감’이 균형감각이라고 덧붙였다. 우리는 흔히 ‘균형감각’이라고 하면, 삶을 안온하게 만드는 습관이나 차분함을 마음속에 채우는 일부터 생각한다. 꼭 그렇게 해야만 균형을 맞출 수 있다는 듯이. 한데 황소윤은 이러한 사회적 양상이 삶의 균형감각을 모색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일관되게 만들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러한 염려를 가사로 옮기고 타인들이 꺼리는 정서나 생각, 그것이 빚어내는 이질적인 삶의 측면을 존중하고 다채로이 표현하는 시도가 균형감각이라 재정의했다. 결국 사회적 흐름에서 벗어난 짓을 일삼아 삶의 균형감각이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청개구리 기질이나 반골 기질의 소유자야말로 자기 나름의 균형감각을 지닌 존재라고 이야기한다.
이 순간에도 내가 내린 결정, 제시하는 방안들이 주된 사회적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은 듯해 위축된 이들을 떠올린다. 하지만 황소윤의 말을 빌려오자면, 당신이 겪는 그 불화의 지점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어딘가에 반드시 채워져야 할 균형감각일지 모른다. 조화만큼이나 불화하는 태도로 나의 삶을 채워나간다는 것은 인간에게 허락된 삶의 묘미이자 예상치 못한 성취에 다다르는 생활방식이다. 불화할 수 있는 용기를 자기 인생에 채워나가길 바라는 당신에게 응원과 지지의 마음을 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