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人지도

책의 온기에 스며들어

속초에 가면 꼭 가야 한다는 곳이 있다.
바다도 산도 아닌 ‘서점’이다.
동아서점은 빼곡한 책만큼이나 품고 있는 이야기가 많다.
자그마치 70년 세월이 켜켜이 쌓여있는 동아서점의
평범하고도 비범한 이야기를 들어 본다.

동아서점 김영건 대표

📝글. 조수빈  /  📷사진. 황지현

나의 오랜 놀이터

‘서점’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대개 이렇다. 잔잔한 음악 소리, 이따금 들리는 사람들의 속삭임, 책장을 살피는 아주 느린 걸음들과 사락사락 종이책이 넘어가는 소리. 이처럼 서점은 대체로 조용하고 차분하다. 아무래도 동네 어른들이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던 사랑방이나 아이들이 숨바꼭질하던 놀이터가 ‘서점’일 거라고는 상상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동아서점은 속초 지역민들에게 그런 곳이었다.
동아서점은 1956년 문을 열어 속초의 역사와 함께 걷고 있는 공간이다. 김영건 대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이어 3대째 이곳을 운영하고 있다. 그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에 동아서점은 아주 시끌벅적하던 곳이었다. 1990년대는 전국의 서점들이 호황을 누리던 때에요. 입학 시즌에는 교과서나 참고 서적이 불티나게 팔렸고, 만화 주간지가 나오는 날이면 동네 아이들이 하교하자마자 서점으로 달려왔죠. 월말이면 수금하러 온 출판사 영업사원들이 줄을 서가며 업무를 처리했고요. 제게도 서점은 신나는 곳이었어요. 친구들과 창고에서 숨바꼭질도 하고, 옥상에서 간식을 먹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2000년대 온라인 서점이 등장하며 동네 서점의 황금기는 저물었다. 서울에서 대학 생활을 하던 김 대표는 속초에 올 때마다 비어있는 서점을 보며 부모님께 이제 그만 접고 두 분의 노년을 즐기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도 “문 닫기 전에 저에게 말은 해 주세요.”라고 했었다.아버지께 연락이 온 건 2014년이었다. 서점을 다른 곳으로 이전할 것인지, 아예 문을 닫을 것인지 기로에 서 있다며 혹시나 네가 운영해 보겠냐는 제안이었다.
당시 그는 사회초년생으로 막 발을 떼기 시작해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민이 많은 시기였다. 그랬기에 아버지의 제안은 마치 현실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기회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덥석 제안을 받아들이고 속초로 돌아왔다.

서점과 손님의 감도 높은 교감

김 대표에게 던져진 숙제는 동아서점의 확장 이전이었다. 큰 고민 없이 덜컥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겁이 났을 법도 한데, 김 대표에게는 그럴 시간조차 없었다. 서점을 통째로 옮겨야 하는 데다, 새로운 공간으로 꾸미기 위해서는 고민할 게 많았다. 아버지 대에 동아서점이 학습참고서를 주로 다루는 현실과 타협한 서점이었다면, 그는 좀 더 ‘서점다운 서점’을 만들기를 원했다.
“서점에 책이 너무 많다 보니 단절되고 답답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덜어내기로 했어요. 책이 좀 덜 꽂혀 있더라도 한 권 한 권이 눈에띄고, 책을 고르는 서로의 모습도 잘 보이면 좋겠다 싶었어요. ‘책’이라는 교집합으로 많은 사람들이 연결되게 끔요.” 동아서점에 들어서면 서점의 모든 공간이 한눈에 들어온다. 손님들이 어떤 코너에서 책을 보고 있는지도 알 수 있다. 벽면에 붙은 책장을 제외하고는 모든 서가가 낮은 덕분이다.

또 하나 심혈을 기울인 건 큐레이션이다. 대형 서점과 달리 동네 서점은 책방지기의 기준에 따라 책을 정렬해 둔 방식이 천차만별이다. 그중에서도 동아서점은 이름난 큐레이션 맛집이다. 김 대표는 제 삶 속에서 맞닥뜨리는 고민들을 주제로 삼기도 하고, 손님들과의 이야기 속에서 힌트를 얻기도 한다. 때로는 서점 운영자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이는 동아서점과 손님이 책으로 나누는 대화라 볼 수 있다. “작년 연말에는 일 년간 서점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들을 책 10권으로 추려 소개했어요. ‘평범하고도 비범한 동아 북 어워드’라는 이름이었는데, ‘손님들에게 정말 여러 번 추천했는데 한 번도 통하지 않은 책’, ‘할아버지 사장이 올해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 ‘자영업자로서 책방지기에게 많은 도움이 된 책’ 등이었죠. 책마다 달아둔 코멘트가 재미있다며 인기가 많았어요.” 이밖에도 매월 동아서점만의 베스트셀러를 집계하고 있다. 80% 정도는 시중의 베스트셀러와 궤를 같이하지만, 20%는 업계의 인기 척도와는 무관한 작품이다. 그중 10%는 큐레이션에서 비롯된 책이고, 나머지 10%는 ‘여행’, ‘휴식’ 등을 주제로 하는 책들이다.

  • 서점에서 마음을 열 수 있다면

    동아서점을 찾는 손님은 대부분 책을 심도 있게 즐기는 ‘헤비 리더’들이다. 먼 타지에서 한 달에 한두 번씩 꾸준히 방문하는 느슨한 단골도 많다. 최근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에는 새내기 손님이 많아졌는데, 그 때문에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았다. “한동안 전쟁이었어요. 손님들도 줄을 섰고, 저희도 한강 작가의 책을 구하느라 진땀을 뺐었죠. 한강 작가 덕분에 서점에 처음 방문한다는 분들이 많았어요. ‘동해 작가’라던가 ‘강산 작가’라는 식으로 이름을 잘못 기억하는 귀여운 분들도 계셨죠.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서점을 찾는 분들이 많아졌다는 건 분명 반가운 일이에요.”
    그에게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물었다.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김 대표는 책의 바다 한가운데에 서서 ‘책을 꼭 읽어야 할 이유는 없다’라고 말했다. 독서란 마음이 시켜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소설가 다니엘 페낙의 말을 빌리자면 책은 훔쳐온 시간 속에서 읽는 거래요. 아무리 바쁘고 피곤하더라도 책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면 그 시간을 쪼개서라도 독서를 한다는 거죠. 마음을 훔치는 책을 만나기 위해서는 서점에 가야겠죠. 온라인 서점, 그러니까 모니터 속에서는 그런 책을 절대 만날 수 없을 거예요. 그냥 구경하려는 마음으로 한번 와 보세요.”

    그가 사람들에게 서점으로의 초대장을 무심하게 툭 건넸다. 동아서점이 아니라도 속초에 방문할 이유는 많다. 아름다운 자연이 있고 맛있는 음식들이 있으니까. 그러는 와중에 동아서점도 슥 끼워 넣어 보는 건 어떨까. 특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김 대표가 원하는 경험이란다. “동아서점이 평범하게 기억되길 바라요. 그러면서도 편안하게요. 마치 위안이 필요할 때 떠오르는 안식처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