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쓸모

함께 해 더 빛나는
세기의 소울메이트

‘소울메이트’의 사전적 의미는 ‘마음이 통하는 친구’이다.
마음이 통한다는 건 그 자체로 서로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서로에게 영감을 주고, 위안을 주며 앞으로 나아갔던 세기의 소울메이트를 소개한다.

📝글. 조수빈

세계를 종횡무진한 최고의 파트너

김환기와 김향안
김환기와 김향안은 부부이자 둘도 없는 소울메이트이자 함께 예술세계를 개척하기 위한 동반자였다. 김향안의 본래 이름은 변동림. 그러나 김환기와의 결혼 후 그의 성과 아호를 이름 삼고 남편과 일심동체의 삶을 살았다. 김향안은 김환기를 전폭적으로 서포트했다. 어찌 보면 대장부 같은 면모였다. 김환기는 40대 중반의 나이에 문득 자신의 그림이 세계적으로 어느 위치에 있는지 궁금하다며 “파리에 가야겠어.”라고 선언했는데, 그 말을 들은 김향안은 다음날 곧장 프랑스 영사관에 가 비자를 받고 혼자 출국길에 올랐다. 이유인즉슨, 언어에 소질이 있던 본인이 남편의 작업실을 미리 마련해 두고 미술계 인맥을 쌓아두기 위해서였다고. 그리고 꼭 일 년 만에 김환기를 파리로 불렀다. 김환기가 세계 무대에서 종횡무진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김향안이 있었다. 이후 김환기가 세상을 떠난 뒤 김향안은 한동안 큰 상실감에 빠져 지냈다. 그러나 이내 자신만의 방식으로 떠난 이를 서포트하기 위해 환기재단을 설립, 1992년에는 환기미술관을 개관했다.

동지이자 라이벌 관계의 두 거장

고흐와 고갱
19세기 말, 인상파 이후 미술사조는 격변의 시기를 맞이했다. 이 시기에 예술을 끌어간 두 거장이 있으니, 빈센트 반 고흐와 폴 고갱이다. 두 사람은 서로의 예술적 재능에 감명받아 강한 끌림을 느꼈다고 한다. 이후 고흐가 자신이 살고 있는 아를(프랑스 남부의 도시)로 고갱을 초대했고 두 사람은 두 달 정도 함께 지내며 작품 활동을 했다. 이 시기 동안 두 사람은 서로의 열정에 불을 지피며 예술성을 폭발시켜 나갔다. 고흐의 <해바라기>, 고갱의 <레 미제라블> 등 두 사람의 대표작이 탄생한 시기도 바로 이때다. 순조로워 보이던 이 동행은 오래가지 못했다. 사실 두 사람은 성격부터 추구하는 작품의 방향까지 많은 부분에서 달랐다. 작품에 대한 접근방식에 대해 자주 논쟁을 벌였고, 서로의 작품에 대한 피드백이 다툼으로 이어지는 일도 많았다. 결국 고갱이 고흐를 떠나며 한때 예술적 동지로 지내던 두 사람의 인연은 끝이 났다. 그렇지만, 이후 고갱의 그림을 살펴보면 해바라기를 그려 넣어 고흐에 대한 경의를 표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짧고도 강렬했던 관계가 각자의 인생에 커다란 흔적을 남긴 것이다.

트렌드를 선도한 환상의 짝꿍

오드리 햅번과 위베르 드 지방시
영화 <로마의 휴일>로 얼굴을 알린 오드리 햅번은 데뷔 초만 해도 할리우드 영화계에서는 낯선 캐릭터였다. 글래머러스한 몸매가 우상화되던 시기에 청순하고 가녀린 이미지의 햅번은 돌연변이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 이유로 차기작 <사브리나>의 의상을 구하기 위해 파리로 향했을 때도 여러 디자이너들에게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패션 브랜드 ‘지방시’의 설립자인 위베르 드 지방시도 처음엔 햅번에게 자신이 만든 옷을 주길 거절했다. 그러나 햅번의 끈질긴 부탁 끝에 한 가지 의상을 내어주었는데, 꼭 처음부터 그를 위해 만들어진 옷처럼 잘 맞았다고. 그렇게 햅번은 <사브리나>를 통해 몸에 딱 붙는 카프리 팬츠와 보트넥 셔츠, 하이웨이스트 반바지 등 지방시가 디자인한 옷을 선보였고, 많은 여성들을 열광하게 하며 새로운 트렌드를 창조했다. 오드리 햅번은 지방시에 대해 “그가 만든 옷은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옷이다.”라며 “그의 옷을 입으면 나도 모르게 그냥 기분이 좋아진다.”라고 덧붙였다. 두 사람은 약 8편의 영화에서 배우와 디자이너로 함께 했으며, 오드리 햅번은 아카데미 시상식을 비롯한 각종 레드카펫 행사에서 늘 지방시 드레스를 입었다. 이밖에도 플랫슈즈, 실크 스카프, 트렌치코트, 검정 터틀넥 등 두 사람이 함께 유행시킨 패션 아이템은 셀 수 없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