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이라는 의식

신성한 의식이나 중요한 일을 앞두고 우리는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정비한다. 이 같은 ‘목욕재계’의 역사는 신라시대에서부터 내려온다. 불교 국가였던 신라에서는 제사와 같은 의식을 행하기 전 몸을 깨끗이 하는 것이 중요한 계율이었다. 당시 불교 경전에는 하루에 몇 번씩 목욕을 해야 한다는 것까지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사찰에서 승려들이 사용하던 목욕탕이 우리나라 공중목욕탕의 시초인 셈이다. 고려시대에 목욕은 질병 예방과 치료의 개념으로 인식되었다. 하여 남녀가 함께 목욕을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고려인들이 하루에 서너 차례 목욕을 했고 개성의 큰 내에서 남녀가 한데 어울려 목욕을 했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하지만 유교사회였던 조선에서는 타인에게 벗은 몸을 보여주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 일로 여겼다. 심지어는 집에서 홀로 목욕을 할 때에도 옷을 다 입은 채로 ‘부분 목욕’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다 삼짇날(3월 3일), 단오(5월 5일) 같은 날에 전신욕을 즐겼다. 조선시대 화가 신윤복이 그린 <단오풍정>에 단옷날 냇가에서 목욕을 즐기는 여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목욕이 병을 낫게 한다고 믿었던 이 시기에는 왕과 귀족들 사이에서 ‘물이 좋은 곳’을 찾는 것이 중요한 과제여다. 조선시대 『경국대전』과 『대전회통』에는 온천을 새로 발견한 사람에게 3계급 특진을, 직위가 없는 사람은 관리 7등급에 임명하는 보상을 내렸다고 한다. 이때 성행한 온천이 바로 동래온천과 온양온천 등이다.

대중목욕탕 역할의 변천사

오늘날 우리가 아는 형태의 대중목욕탕이 들어선 건 1900년대 초의 일이다. 습한 기후에 목욕을 생활화했던 일본인들이 우리 땅에 정착하면서 다방, 이발소 등을 겸한 목욕집들이 개업하기 시작한 것. 그러다 1924년 평양에서 본격적인 ‘대중목욕탕’이 문을 열었다. 이는 부(府)에서 직접 관리인을 두어 사용료를 받는 일종의 공영 목욕탕이었다. 한 해 뒤 1925년 서울에도 공중목욕탕이 생겼는데, 남녀 구별이 없던 대중목욕탕의 등장에 한국인들은 큰 거부감을 보였다.
그럼에도 목욕탕이 확산된 이유는 결국 ‘위생’과 ‘청결’ 때문이었다. 농어촌 지역에는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목욕탕 건립과 이용이 장려되었고, 대도시 위주로 상하수도 기반이 갖춰지며 1960년대 146곳이던 서울의 공중목욕탕이 1985년 1,768곳으로 급증할 만큼 목욕탕사업이 붐을 이뤘다. 일요일 아침이면 가족끼리 목욕탕을 찾는 ‘목욕탕의 시대’가 열린 것도 이 즈음부터다. 목욕탕의 수가 많아지고 가격도 저렴해지며 대중적인 인기를 끌게 된것이다.
최근 목욕에 놀이, 휴식의 기능이 더해진 찜질방, 스파 등이 등장하며 단순 목욕만 하는 ‘목욕탕’의 인기는 사그라드는 추세였다. 하지만 최근 대중목욕탕이 ‘K-컬쳐’의 붐을 타고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다. ‘현실 고증의 끝판왕’이라 불리는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대중목욕탕 씬이 등장하며 많은 외국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 이에 한국 관광을 오는 외국인들이 대중목욕탕을 찾거나 세신 체험을 하기도 한다. 이처럼 오랜 세월 우리의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해 온 목욕은 이제 새로운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장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