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번의 무대, 천 가지의 얼굴

1989년 데뷔한 이후 지금까지 단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무대에 올라 노래하고 연기하는 삶을 살고 있는 최정원 배우. 그가 거쳐 간 작품은 대충 헤아려 봐도 열 손가락은 훌쩍 넘을 정도로 많지만 그중에서도 ‘최정원’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은 <맘마미아!>이다. 반대로 <맘마미아!>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배우 또한 최정원이다. 전설적인 팝 그룹 아바(ABBA)의 노래를 엮어 만든 뮤지컬 <맘마미아!>는 그리스의 작은 섬을 무대로 주인공 도나와 친구들, 딸 소피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최 배우는 서른여덟의 나이에 도나를 만나 1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도나로서 굳건히 무대를 지키고 있다. 한 명의 배우가 단일 역으로 1,000회 이상 공연에 오르는 것은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실제로 전 세계 50여 개국에서 공연된 <맘마미아!>의 최장수 도나로 손꼽힌다.
이밖에도 그를 빼놓고는 논할 수 없는 작품이 많다. <시카고>는 2000년 초연을 시작으로 20년 넘게 인연을 이어오고 있으며, <하데스타운>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헤르메스로서 역할의 스펙트럼을 넓혔다.
최 배우에게 무대는 ‘반복’이 아니라 ‘새롭게 나아가야 할 길’이다. 그것이 같은 공연일지라도 어제보다 더 나은 공연을 만들기 위해 집요하게 캐릭터를 파고들고, 혹독하게 자기 관리를 한다. 때로는 ‘인간 최정원’이 살아온 길에 영향을 받아 캐릭터의 깊이가 더 풍부해지기도 한단다. 덕분에 하나의 배역으로 천 번을 넘게 무대를 올라도 그는 여전히 새로운 얼굴을 보여 준다. 그것이야 말로 최 배우가 가진 위대한 기술이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무대뿐

올해로 데뷔 36주년. 최 배우는 데뷔를 한 후 내리 달렸다. 공연이 없는 날에는 연습을 하고, 연습이 없는 날에는 체력 관리하랴, 컨디션 조절하랴 쉴 틈이 없단다. 힘에 부치는 날이 있을 법도 한데 무대만이 그의 운명인 걸까, 누구나 한 번은 찾아온다는 슬럼프조차 느낀 적이 없단다. “저는 공연장 가는 길이 가장 설레요. 마치 어린 아이들이 놀이터에 가는 기분이랄까요. 매일매일 놀이터를 간다고 해서 아이들이 지겨워하지는 않잖아요. 저도 마찬가지에요. ‘오늘은 또 어떤 일이 일어날까?’, ‘오늘은 노래를 더 잘 해야지!’라는 생각뿐이죠. 그런 걸 보면 저는 무대 위에서 가장 순수해지는 것 같아요.”라는 최 배우는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자신을 ‘행운아’라고 표현했다. 사랑하는 사람은 빛이 난다고 했던가. 무대를 사랑하는 그의 아우라는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얼마 전 뮤지컬 <맘마미아!>의 연출을 맡고 있는 폴 게링턴을 만났는데, 그가 ‘난 한국에 오는 게 늘 즐거워! 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너의 공연을 볼 수 있기 때문이야.’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전 세계 도나 중 커튼콜은 제가 제일 잘한대요. 제가 전하고픈 에너지를 알아주는 구나,라는 생각에 괜히 눈물이 찔끔 났어요.”라며 웃었다.무대 위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는 최 배우는 아이러니하게도 항상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다. 항상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무대에서 아쉬움일랑 한 톨도 남아있지 않도록 뛰어 논다. 하지만 그와의 대화에서 확신할 수 있었다. 내년에도, 십 년 뒤에도, 이십 년 뒤에도 그를 무대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배우 최정원’이 있어야 할 곳은 다름 아닌 무대라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 뮤지컬 <맘마미아!>의 도나 역으로 무대에 오른 게 벌써 19년째라고요. 의미가 남다를 것 같아요.

    <맘마미아!>는 저에게 참 특별한 작품이에요. 배우로서 역사를 쓰고 있다는 생각에 벅차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 가족이 이 작품과 함께 성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 제가 아이를 낳고 키우는 과정에서 비로소 도나에게 몰입할 수 있었죠. 제가 겪은 엄마로서의 성장통과 ‘딸’이라는 존재가 알려준 수만 가지의 감정을 노래할 때면, 그 순간만큼은 배우가 아니라 정말 한 아이의 엄마로서 노래하는 것 같아 울컥해요.
    딸 유하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해에 처음 도나 역을 맡았는데, 그 애가 벌써 27살이 됐어요. 극 중 딸인 소피보다도 나이가 많죠. 언젠가는 딸이 <맘마미아!>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거예요. ‘우리 엄마에게도 저런 어린 시절이 있었겠구나’ 싶었대요. 우리 모녀에게 많은 것을 알려준 작품이라 애틋합니다.

  • <시카고> 또한 록시와 벨마를 거치며 20년 째 무대에 오르고 있습니다. 하나의 역할을 오래 맡을 수 있는 이유를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저는 고여 있지 않은 배우예요. 언제나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려고 해요. 같은 캐릭터를 다시 연기하게 되었을 때 혹여나 제가 놓친 부분은 없었는지 늘 고민하죠. 연기력과 표현력에 대한 연구는 물론이고 노래 레슨도 꾸준히 받고 있고요. 게다가 제 삶의 궤적에 따라 캐릭터에 대한 몰입도가 달라지거든요. 그래서 저는 매 시즌을 거듭할 때마다 “이번 시즌이 가장 좋았어요.”라고 말하는데, 진짜예요. 어제보다 오늘 더 성장했으니까요.
  • 뮤지컬 배우로서 여러 캐릭터의 삶을 살아오고 계십니다. 캐릭터를 해석하는 배우님만의 기술은 무엇인가요?
    <시카고>의 록시나 벨마처럼 1920년대를 살아본 적도 없고, 누군가를 총으로 쏴본 적도 없어요. <하데스타운>의 헤르메스처럼 지하세계를 가본 적도 없죠. 이처럼 제가 경험해본 적 없는 캐릭터의 배경을 이해하고 표현하기 위해 책이나 영화 같은 자료들을 찾아보기도 하고, 감정을 들여다보기 위해 고민도 많이 해요. 반면 <맘마미아!>에선 좀 더 자유로워요. 저도 누군가의 딸이자, 엄마이자, 친구잖아요. 제가 느낀 사랑과 우정을 토대로 해석하니 캐릭터의 방향성을 보다 정확하게 알 수 있더라고요.
    이렇듯 여러 종류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예요. 그 시절에 태어나지도, 그곳에서 살지 않아도 경험할 수 있으니까요. 요즘도 공연이 있는 날이면 ‘나 오늘 저녁에 그리스 해변에서 집을 짓고 사는 ’도나 ‘로 살게 되잖아!’라는 생각에 아침부터 눈이 번쩍 떠진다니까요.
  • 극을 끝까지 끌고 가기 위해서는 엄청난 몰입이 필요할 것 같아요. 36년간 무대에 오르며 체득된 몰입의 기술이 있나요?
    뮤지컬 <맘마미아!>의 경우 1,000회가 넘게 공연을 하다 보니 대사가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나와요. 상대방 대사까지 줄줄 외우고 있죠. 하지만 관객들은 모르잖아요. 모든 것이 오늘 처음 일어난 일인 듯 연기해야 하는데, 그 지점이 정말 재미있어요. <시카고>는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거는 듯 연기하는 장면이 많은데, 그럴 땐 관객에게서 에너지를 받아요. 호응이 너무 뜨거운 날에는 저도 사람인지라 흥분을 하게 되는데, 같은 공연 안에서 조금씩 다른 점을 찾는 게 N차 관람의 묘미 아닐까요(웃음).
  • 무엇이 배우님을 계속해서 무대 위에 서게 만드나요.
    무대 위에서 가장 순수해진 저를 만나요. 흔히들 ‘초심을 잃지 말라’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무대 위에만 서면 늘 흥분되고 신나거든요. 마치 이 일을 처음 했을 때처럼요. 이렇게 사랑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으니 얼마나 행운이에요.
    요즘은 <맘마미아!>와 <멤피스> 공연으로 거의 매일 무대 위에서 살고 있는데 힘들기는커녕 컨디션이 훨씬 좋은 거 있죠. 천상 무대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인가 봐요.
  • ‘뮤지컬 배우 최정원’을 롤모델로 꼽는 후배들이 많습니다. 누군가의 롤모델이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인가요.
    후배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구나’ 싶은 마음이 들어 가슴이 뜨거워져요. 특히 배우로서 나이가 드는 것이 무서울 수도 있는데 “최정원 선배 같은 배우가 될 거야. 선배님처럼 나이 들고 싶어.”라고 말을 하는 후배들을 보면 행복해지는 동시에 책임감이 느껴지죠.
    사실 후배들에게서 제가 도리어 자극을 받기도 해요. 동료들의 작품을 꼭 챙겨 보는 편인데, 후배일지라도 분명 제가 배울 점들이 있거든요. 저는 데뷔한 지가 워낙 오래 됐잖아요. 90년대 배우로서 제가 좀 뒤쳐질 수 있는 점들을 지금 한창 사랑받고 있는 후배들을 보며 배우는 거죠. 서로 좋은 자극을 받으며 성장하고 싶어요.
    배우 최정원의 꿈은 무엇인가요?
    뮤지컬 <맘마미아!>의 넘버 중 ‘댄싱퀸(Dancing Queen)’이라는 노래가 있어요. 며칠 전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는데 제가 등장할 때 그 노래가 나오더라고요. 가사가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와 저의 에너지가 닮았나 봐요. 실제로 ‘댄싱퀸’은 제 인생 곡이기도 해요. ‘신나게 춤 춰봐! 인생은 멋진 거야! 너는 정말 최고의 댄싱퀸이야!’라는 가사가 마치 저한테 하는 말 같더라고요. 이 말을 제 묘비명으로 새겨달라고 딸에게 말해두었어요.
    저는 여전히 무대가 좋아요. 관객들이 없는 곳에서 노래하고 연기하는 제 모습은 상상할 수가 없죠. 60살, 70살, 마지막 순간까지 무대에서 노래하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제 자신을 관리해야겠지만, 저는 잘 할 거예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