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로 물들다
광주에 흐르는
조선백자의 명맥
‘도자기’ 하면 ‘이천’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조선백자의 산지는 경기도 광주다. 광주 각지에 흩어진 300여 개의 가마터가 이를 증명한다. 광주를 조선백자의 고장으로 만든 일등공신은 자연과 사람이다. 긴 세월 백자를 빚어낸 광주의 품속엔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글. 조수빈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경기도자박물관, 광주시청
▲ 백자 철화 매화 대나무무늬 항아리
부드럽고 견고하게,
자연이 빚어낸 아름다움
매끄럽게 내려오는 굴곡, 우윳빛 유색 위로 섬세하게 그려 넣은 자연 한 폭. 조선백자 이야기다. 국가유산 59점(국보 18점, 보물 41점)을 포함한 조선백자는 우리나라와 세계 각국의 박물관에 흩어져 있다. 그중 광주에 간다는 건 조선백자의 역사에 귀 기울이는 일이다. 조선 왕실의 백자를 제작하고, 형태와 품질에 대해 관리·감독했던 사옹원 분원은 400여 년간 광주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당시 광주는 비옥한 흙과 땔나무, 물이 풍부했고 수도(한양)와 가까운 데다 한강을 끼고 있어 운반이 용이했기에 조선백자가 번성하기에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사옹원 분원이 처음 광주에 자리 잡은 건 15세기 후반. 백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마에 불을 땔 나무가 필수였기에 분원은 땔나무 산지를 따라 10년 주기로 이동했다. 그로 인해 퇴촌면, 실촌면, 초월면, 도척면, 경안면, 오포면 등 광주시 일대 거의 모든 지역에 걸쳐 조선백자를 굽는 가마터가 생겼다. 현재까지 흔적을 안고 있는 가마터는 330여 개, 그중 68개소는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존·관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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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태청유자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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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자철화 운룡문 호
광주가 들려주는
가장 한국적인 이야기
조선 중기 전란에 주춤했던 분원은 18세기가 되어 다시 한번 부흥하나 했지만, 왜 사기와 서양 자기 틈에서 경쟁력을 잃어갔다. 1883년 분원이 민영화되며 새로운 시도를 꾀했지만 결국 변혁의 파고를 넘지 못했다. 역사의 부침에도 불구하고 조선백자의 명맥이 현시대까지 닿고 있는 데는 이름 없는 도공들의 역할이 크다. 전국 각지로 흩어졌던 도공들은 해방 후 다시 광주로 모였다. 전통 자기와 산업 자기를 빚어내며 그 맥을 이어간 덕분에 1960년대 이후 요장이 늘고 도예촌이 형성됐다. 달항아리의 대가인 권대섭 도예가도 광주 팔당에 흙 가마를 열었다.
곤지암도자공원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 경기도자박물관을 채운 고요한 아우라, 광주왕실도자컨퍼런스에서 퍼지는 흙내음까지. 오늘날에도 이곳 광주에서 ‘도자’는 여전히 익숙한 문화다. 전통과 새로움 사이를 느슨하지만 견고하게 잇는 조선백자의 혼이 고스란히 광주에 녹아 있다. 그러니 조선백자의 역사는 곧 광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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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자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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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왕실도자컨퍼런스에서 진행 중인 물레 체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