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홀린 묘령의 존재

신화 속에는 늘 사람들을 홀리는 존재가 있었다. 수많은 마녀, 요정들 사이에서 단지 목소리만으로 사람들을 유혹한 아름답고도 위험한 존재는 그리스 신화 속 세이렌이다. 세이렌은 강의 신 아켈로스와 비극의 여신 멜포메네 사이에서 태어난 세 명의 자매로 매혹적인 목소리로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특히 그들의 음악적 재능은 너무 뛰어나 바람마저 진정시킬 정도였고, 그 어떤 선원이라도 노래하는 세이렌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 세이렌은 해안 바위틈에서 고혹의 노래로 선원들을 유인해 배를 난파시키는 잔혹한 장난을 즐겼다. 한마디로 유혹과 파멸의 상징이었다. 『오디세이』에서는 ‘세이렌은 그들에게 접근하는 모든 사람들을 매혹시키며, 인간들의 해골이 높이 쌓여 있는 바위 위에 앉아 있다’라고 묘사했다.
이 당시만 해도 세이렌은 우리가 흔히 아는 ‘인어’의 형상이 아니었다. 기원전 4세기의 글에서는 여성의 얼굴, 새의 몸,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모습으로 묘사되곤 했다.
그런 세이렌이 지금의 매혹적인 인어가 된 건 ‘신비로운 노랫소리로 선원들을 유혹한다’라는 대목에 따라 여성성이 강조되면서부터다. 중세 후반 미술작품에 표현된 세이렌은 여성의 상체에 물고기의 꼬리가 합쳐진 인어가 되어 있었고, 19세기에 이르러서는 노랫소리로 남자를 유혹해 죽게 만드는 ‘팜므파탈’의 이미지까지 갖게 됐다. 심지어는 부정적인 존재가 되기도 했다. 특히 당시 기독교에서 여성의 성적 매력은 남성을 타락시키는 위험한 힘이라고 여겼는데, 인어에 얽힌 전설이 겹치며 죄와 타락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이다. 실제로 이 시기의 교회나 수도원 장식에 인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수도사나 신자들을 경고하는 목적이었다고.

낭만주의 시대 속 인어는 깊은 감정과
내면의 갈등을 가진 존재로, 더이상
유혹의 대상이 아닌 사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순수하고
고귀한 존재가 된 것이다.

파멸에서 희생으로, 희생에서 자유로

세이렌의 이미지가 바뀌게 된 것은 근대에 들어서면서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 덕분이다. 동화 속에서 인어는 자신의 사랑을 위해 목소리를 포기하고 끝내는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거품이 된다. 낭만주의 시대 속 인어는 깊은 감정과 내면의 갈등을 가진 존재로, 더이상 유혹의 대상이 아닌 사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순수하고 고귀한 존재가 된 것이다.
그로부터 150여 년이 지난 1989년, 디즈니에서 선보인 애니메이션 <인어공주>는 인어의 이미지를 바꾸는 결정타가 됐다. 호기심 많은 소녀 아리엘은 자기 꿈을 위해 바다를 벗어나고자 한다. 원작의 비극과는 달리 아리엘은 자신의 사랑을 이루고 인간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디즈니의 세계적인 인기를 등에 업고 인어는 주체적인 캐릭터로 대중들에게 강하게 인식됐다. 이후 여러 콘텐츠에서 인어는 모험, 자유, 호기심, 순수함 등을 상징하는 존재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고대 그리스의 바위섬에서 노래로서 뱃사람들을 유혹하던 세이렌이 성장 캐릭터인 인어공주가 되기까지. 시간이 지나면 세이렌의 이미지는 또 다르게 바뀌어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듯 끊임없이 재해석되는 신화 속에는 인간이 시대마다 품어온 욕망과 이상이 담겨 있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