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미치게 하는 서핑
‘올여름 휴가 어디로 가지?’라는 생각을 했을 때 빠지지 않는 곳이 바로 바다다. 여름의 물놀이만큼 더위를 씻기 좋은 게 없기 때문. 그런 의미에서 권민호 씨는 강릉 주문진에서 나고 자란 ‘바다’수저다.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게 푸른 물결이었고, 귀 기울이면 들리는 게 시원한 파도 소리였지만, 그에게 바다는 짠내 나는 공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단다.
그러다 바다의 매력을 알게 된 건 어느 겨울, 양양에서 본 낯선 광경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보드 같은 걸 들고 바다로 뛰어들더라고요. 까만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 얼핏 해녀 같기도 했는데, 그건 또 아니었어요. 희한했죠.” 그가 본 것은 서퍼들이었다. 당시만 해도 서핑은 대중에게 익숙한 스포츠가 아니었기에 그 광경이 신기하게만 보였다. 동시에 궁금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길래 이 추운 날씨에 바다로 뛰어들었을까?
단순한 호기심에서 올라탄 보드 위에서 민호 씨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만났다. 보드에 올라타 느낀 황홀함은 그를 단박에 서핑의 매력에 빠지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사실 저는 운동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어요. 쉬는 날이면 게임을 하거나 영화를 보면서 시간을 보냈죠. 그래서 스스로 느긋함 속에서 에너지를 얻는 타입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파도를 미끄러지는 짜릿한 순간이 저를 미치게 하더라고요. 흘러가던 대로 인생을 살던 저에게 처음으로 잘하고 싶은 것이 생겼어요. 그게 서핑이었어요.”
‘바다’라는 낙원에 사는 일
서핑에서 가장 기본인 ‘테이크 오프(Take-off)’란 보드에서 일어나는 동작을 말한다. 기본이지만 초보자에게는 호락호락한 동작이 아니다. 짧은 순간 몸을 일으켰다고 해도 금세 바다에 빠지기 일쑤. 민호 씨는 이 찰나의 성공이 주는 짜릿함이 서핑을 놓지 못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어려운 기술을 구현하기 위해 수십 개의 파도를 타야 해요. 아주 오랜 인내의 시간이죠. 그러다 아주 잠깐이지만 ‘됐다!’ 하는 순간이 오거든요. 그 순간의 도파민이 어마어마해요. 한번 성공하면 일주일 내내 그 생각만 난다니까요. 그래서 내일도, 모레도 매일매일 파도를 기다리게 되는 거예요.”
서핑이 민호 씨를 애타게 만드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자연이 허락해 주어야만 할 수 있다는 점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서핑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날은 일 년에 100일이 채 안 된단다. 주로 가을과 겨울에 파도가 좋은 반면 여름에는 파도를 잡기가 힘들다. 민호 씨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날 또한 바다는 고요했다. 파도 소리마저 숨죽인 바다를 보던 그가 요즘 서핑을 못해 아주 힘들다며 우스갯소리를 더했다. 이제는 겨울 바다로 거침없이 뛰어들던 서퍼들의 마음을 백번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얼마 전에는 서퍼 인생에 잊을 수 없는 일도 일어났다. “일본 서퍼 중 이노우에 타키를 좋아해요. 전 세계 서핑 리그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세계적인 선수인데 좋은 기회로 타키를 양양에 초대하게 된 거예요. 함께 파도를 타고, 그의 기술을 배워보기도 하며 좋은 시간을 보냈죠. 하나에 진심으로 꽂히면 이런 날도 오는구나, 싶었어요. 아마 서핑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진심이지 못했을 거예요.”라며 성덕이 되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평생 바다 위에서 살기로 했다
보드 위에 올라서는 건 ‘서퍼’의 몫이다. 그렇기에 서핑은 혼자 하는 스포츠라고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민호 씨의 말에 따르면 서핑은 ‘같이’ 하는 스포츠란다. 우선 자연과 호흡을 맞춰야 한다. 바다에서는 하루에도 수십만 개의 파도가 몰려오는데, 그중 내가 탈 수 있는 파도는 정해져 있다. 날씨, 파도의 크기와 질, 내가 선택한 파도까지 이 모든 것이 맞아떨어져야 제대로 된 서핑을 즐길 수 있단다. 두 번째는 사람들과의 호흡이다. “서핑은 거울을 보며 하는 스포츠가 아니기 때문에 버디(함께 서핑을 하는 동료)들이 정말 중요해요. 서로 환호하며 에너지를 주고받기도 하고, 제가 멋진 기술을 해냈을 때 증인이 되어주기도 하죠. 그 맛에 더 힘이 나고요. 혼자 하면 훈련이지만, 같이하면 즐거운 놀이랍니다.”
서퍼로 산 지도 벌써 10년. 그 사이에 ‘서핑’에 대한 마음도 조금 바뀌었다. 예전에는 그저 즐기는 사람이었다면, 이제는 서핑 씬이 넓어지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단다. 일종의 책임감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강습의 스타일도 바꾸었다. “예전에는 호랑이 같은 선생님이었어요. 어떻게든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거든요. 그런데 엄하게만 하니 ‘서핑은 힘들다’라는 인식이 생기는 것 같더라고요. 뭐든 많은 사람이 함께 즐겨야 문화가 발전하는 건데, 그 생각을 미처 못했던 거죠.” 그러나 실력 향상이 필요한 숙련자들에게는 여전히 엄한 강사라며 웃었다.
마지막으로 민호 씨의 꿈은 ‘서핑하는 멋쟁이 할아버지’로 나이 드는 것이다. “‘아직도 그렇게 서핑이 좋아?’라고 묻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데 정말 여전히 재미있어요. 앞으로도 평생 서퍼로 살고 싶어요. 시간이 오래 흘러 루키들이 저를 보며 ‘저 할아버지는 한평생 서핑을 하며 살았대. 그런데 아직도 서핑을 즐기신대!’라고 말해준다면 더없이 행복할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그의 눈이 반짝였다. 그의 표정은 이미 낙원 속에 사는 사람을 닮아있었다. 이미 ‘바다’라는 자신만의 낙원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