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으로, 하지만 운명처럼
1996 애틀랜타올림픽 은메달, 1998 방콕아시안게임 금메달, 2001 보스턴마라톤 우승, 2002 부산아시안게임 금메달 등 이봉주 선수가 아로새긴 기록은 찬란하다. 그가 2000 도쿄국제마라톤에서 세운 한국 신기록(2시간 7분 20초)은 2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깨어지지 않는 불멸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 선수가 마라톤을 시작한지도 올해로 어느덧 40년, 그중 30년을 ‘국민 마라토너’라고 불리고 있다. 이제는 ‘마라톤이 없는 인생’을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마라톤이 자신의 인생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사실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그의 인생에 ‘달리기’는 없었다. 고작 해야 동네에서 친구들과 노느라 뛰어 다니던 게 전부였다. 그러던 그가 ‘마라톤’의 길을 걷게 된 건 친구의 권유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때 친구의 제안에 따라 특별활동으로 육상부에 들어가게 됐어요. 다른 친구들에 비해 스피드는 좀 떨어졌는데, 지구력이 좋더라고요. 초등학생 시절 등하굣길에 그렇게 뛰어다니던 게 훈련이 됐나 봐요.”라며 장난 궂게 웃었다. 그러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출전한 전국체전 육상 10km에서 3위에 오른 게 결정적인 한방이었다. 그 계기로 체육특기자 전형으로 서울시립대에 입학, 서울시청팀까지 입단하게 됐다.
기적을 향해 달리는 사람
본격적으로 마라톤 선수로 인생을 살게 됐지만, 쉽지 않은 길이었다. “제가 평발에다 왼발이 오른발보다 4mm 정도 큰 짝발이에요. 게다가 초등학교 때부터 운동을 시작했던 다른 선수들에 비해 시작이 늦었으니 악조건만 두루 갖춘 셈이었죠.” 답은 훈련밖에 없었다. 남들보다 일찍 눈을 떠 운동을 시작했고, 늦게까지 남아 훈련했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분명 있었다. 그럴 땐 “포기하지 말고 태극마크를 꼭 달아라.”라고 말하며 자신을 믿어주던 코치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다시 한 발을 내딛었다. 1996 애틀랜타올림픽에서 비로소 은메달을 목에 걸었을 때, 고작 3초 차이로 금메달을 놓친 게 억울할 법도 한데 그는 세상이 떠나갈 듯 환호했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었겠지만 돌이켜 보면 그때 금메달을 못 땄기 때문에 더 오래 선수생활을 할 수 있었단다. 여전히 목표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이 선수는 긍정적인 사고를 발판 삼아 무려 마라톤 대회 44회 출전, 41회 완주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기고 선수 생활을 은퇴했다.
시련은 또 한 번 그를 덮쳤다. 2020년 근육긴장이상증이라는 난치병 진단을 받고 4년을 넘게 고생했다. 두 다리가 자산이던 마라톤 선수에게 뛰는 건 물론 걷기도 쉽지 않다는 건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의 옆을 지키는 가족들과 팬들의 응원에 힘을 입어 피나는 재활을 했다. 결국 그는 다시 일어섰고, 여전히 ‘마라토너’로서 달리는 삶을 사는 중이다.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이봉주 선수. 그와 나눈 이야기 속에서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끝이 있기 마련이라는 걸 알게 됐다. 중요한 건 완주는 결국 ‘자신’의 몫이라는 거다. 때로 삶이 그저 미지의 세계처럼 느껴진다면 그가 달려온 길을 보자. 그가 몸소 밝히고 있는 불빛을 따라 가다 보면 우리는 끝내 완주해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