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대신 운동장을 휩쓸던 소년

공연장의 모든 불이 꺼지자 소란하던 관객석에 적막이 내려앉는다. 무대를 향해 핀 조명이 떨어지고, 그 아래로 등장한 무용수의 곱고 섬세한 몸짓에 관객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국립발레단을 거쳐 해외 유수의 발레단을 섭렵하며 무대를 누비고 있는 이주호 무용수. 그러나 중학생 때까지 그가 누비던 곳은 무대가 아닌 운동장이었다. “워낙 운동을 좋아해서 틈만 나면 운동장을 뛰어 다녔어요. 실력도 제법 좋았어요. 체육 선생님께서 ‘너 선수해도 되겠다’라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런 그가 어쩌다 운동선수가 아니라 발레리노의 길을 걷게 되었을까. 부산예술고등학교에서 ‘몸 잘 쓰고 키가 큰 학생’을 찾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의 학교 선생님들은 단번에 ‘이주호 학생’을 추천했다.
“‘무용’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어요. ‘발레리노’라는 단어도 직업보다는 가요 제목으로 더 익숙했죠. 그런데도 예고로 진학한 건 사실 모델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무용을 하면 몸 선이 예뻐지고, 몸을 쓰는 법도 배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나 예고 생활은 결코 쉽지 않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초등학교 때부터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친구들의 실력과 중학교 3학년 때 급하게 발레를 시작한 자신의 실력은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에겐 무용수에게 가장 필요한 재능 하나가 있었다. 바로 ‘끈기’다. 음악성, 유연성, 표현력, 예술성 등 발레리노에게 필요한 재능이 많은데, 결국 무엇이 부족하더라도 집요하게 갈고 닦을 힘이 있다면 언젠가 빛이 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끈기’라는 힘이 있었다.

질투는 나의 힘

또 한 가지, 이 무용수에게 기폭제가 되어준 건 ‘질투’였다. “어느 날 무용에 엄청나게 진심인 친구가 전학을 왔어요. 무용을 대하는 태도도 진중하고, 연습도 굉장히 열심히 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선생님과 친구들의 관심이 그 친구에게 쏠리는 거예요. 사실 남자 무용수가 몇 없다 보니 제가 조금만 잘해도 칭찬을 받았었거든요. 관심이 빼앗기니 질투가 났죠(웃음).”
슬슬 승부욕이 발동됐다. ‘나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라는 마음으로 연습량을 늘여갔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연습실에만 박혀있기도 했다. 친구와 선의의 경쟁은 물론, 어제의 나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연습에 매진하다 보니 실력이 오르는 건 물론이고, 결국 재미까지 붙게 됐다고.
질투와 승부욕을 동력 삼았던 이 무용수는 예술을 하는 학생이라면 한 번쯤 꿈꾼다는 한국예술종합학교로 진학했고, 이후 국립발레단, 홍콩발레단, 에스토니아 국립 바네무이네 발레단 등을 종횡무진하며 무용수로서의 커리어를 쌓아 나갔다.
항상 더 넓은 곳을, 새로운 곳을 향해 나아가던 그가 선택한 다음 스텝은 뜻밖이었다. 바로 고향 부산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무용수로서 커리어가 탄탄하게 쌓일수록 사명감이 생기더라고요. ‘나의 뿌리가 있는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런 시기에 프랑스 파리의 어느 공원에서 아이들이 춤과 노래를 즐기는 모습을 보게 됐어요. 너무 자유롭고 행복해 보였어요.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을 부산의 아이들도 함께 느끼면 좋겠다 싶어서 고향으로 오게 되었어요.”

예술 생태계를 고민하는 감독

화려한 경력을 뒤로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이 무용수는 지역 예술단체 ‘부산아이디발레단’을 창단하여 음악감독으로 제2막을 열었다. 무용수가 몸으로 표현을 하는 사람이라면, 감독은 메시지를 작품으로 담아내는 사람이다. 그는 음악감독으로서 언제나 ‘지금’의 이야기를 무대 위에 펼치고자 한다. 요즘 그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자연과 도시의 조화다.
“조카가 올챙이를 본 적이 없대요. 제가 어릴 때만 해도 냇가에 가면 쉽게 볼 수 있었는데, 지금 아이들에게 올챙이는 책에서나 볼 수 있는 존재인 거죠. 지금 우리가 보는 이 풍경도 몇 년이 지나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클래식과 컨템포러리가 한 무대에 공존하는 <철근 위의 백조>이다. 그는 자연과 도시, 보존과 개발이라는 상반된 가치를 담아내기 위해 차이콥스키 <백조의 호수>에 전자음을 더했다. 또 직선적인 철근 구조물 위에 살아 움직이는 몸의 선들을 활용하여 확실한 대비를 만들었다. 이 작품으로 그는 지난 4월 열린 제34회 부산무용제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이 무용수는 앞으로 예술 생태계가 더욱 단단해질 수 있도록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더 고민하고 있다. 먼저 관객에게는 ‘쉬운 무용’을 보여주고 싶단다. “메시지를 심층적으로 담아내거나 비틀어 풍자하는 방식도 좋지만, 저는 쉽고 명확하게 전달하고 싶어요. 사람들이 무용을 어려운 예술이라 생각하는데, 무용도 충분히 쉽고 재미있을 수 있거든요. 이해가 되지 않아도 괜찮아요. ‘좋다’거나 ‘재미있다’라고 느껴지는 감정, 그거면 돼요.”
무용수들에게는 무용의 가치를 스스로 느낄 수 있는 자리들을 마련하고 싶다고 했다. 결국 모두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오래 이어가기 위해서는 ‘일의 가치’를 스스로 체감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렇게, 모두가 무용을 사랑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도 무대를 고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