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갈지도

햇살에 반짝이는 정든 길
서울

본사가 대전으로 이전한지 이제 50주년.
최초에 본사가 자리했던 정동길에서 시간을 유영한다.
선선하니 덕수궁에서 청계천을 따라 을지로까지 걸어도 좋겠다.

📝글. 배나영 여행작가  /  📷사진. 황지현

정동길

사부작사부작 시간을 걷다

나뭇잎들이 바람에 살랑이는 정동길에서 ‘광화문연가’를 흥얼거린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걸으며 이 길을 걸었던 푸른 눈의 이방인들을 떠올린다. 구한말 미국공사관에 이어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의 공사관들이 늘어섰던 이 일대를 당시에는 공사관 거리라고 불렀다. 100년이 넘은 역사를 자랑하는 정동교회가 여전하고, 한국 최초의 근대식 극장이었던 원각사도 국립정동극장으로 변신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진한 커피 한 잔이 간절했던 외국인들과 고종이 드나들던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숍도 정동길에 있었다. 한국 근대사를 증언하는 오래된 건물들 사이에서 과거와 현재를 잇는 커피향이 배어난다.

정동길 산책은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단이었던 조선호텔 뒤의 환구단에서 시작해 보자. 덕수궁의 대한문을 지나 서울시립미술관, 정동제일교회, 국립정동극장, 덕수궁 중명전에서 고종의 길까지 이어서 걷는다.

덕수궁

조선의 마지막 궁궐

가을의 서늘한 공기 속에서 궁궐의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이 바람에 흔들린다. 풍경 소리에 실린 덕수궁의 이야기가 차분하다. 고종의 대한제국 선포, 일제강점기의 아픔, 현대 대한민국의 탄생을 겪은 덕수궁은 우리 근현대사의 살아있는 증인이다. 북적이는 서울의 심장부에 위치한 대한문을 지나 덕수궁에 들어서면 위엄있는 중화전이 맞이한다. 중화전 앞마당을 거닐며 왕실의 일상을 상상한다. 대한제국 시기 근대화의 열망을 담은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이 어색하지 않게 눈길을 끈다. 정관헌에 이르면 근대화의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맞이했던 고종의 모습이 그려진다.

지하철을 타고 시청역에서 내리면 바로 만날 수 있는 덕수궁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아 짧게 둘러보아도 좋지만, 대한제국역사관이나 국립현대미술관까지 관람하려면 시간을 넉넉하게 잡고 가자. 한복을 입고 방문하면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청계천

변화하는 서울의 물길

청계광장의 분수대에서 쏟아지는 시원한 물줄기가 청계천의 시작을 알린다. 졸졸 흐르는 천변을 따라 걸으면 한때 청계고가로 뒤덮여 소리조차 내지 못하던 이곳의 변화가 새삼스럽다. 물길을 따라 걷는 연인들과 아이들의 웃음 소리에 조선시대 광통교를 지나다니던 사람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수표교의 수량 측정 시설인 수표석 위로 청계천 곳곳에 설치된 예술작품들이 현대적인 감각을 더한다. 재래시장과 현대식 쇼핑몰이 공존하고, 오래된 건물과 고층빌딩들이 어우러진다. 한국전쟁 후 판자촌이 들어섰던 곳이 생태하천으로 거듭나 메기와 미꾸라지가 헤엄치고, 청둥오리와 왜가리가 날아드는 도시재생의 상징이 되다니, 세월이 싱그럽다.

서울의 심장부를 가로지르는 청계천을 따라 청계광장에서 동대문디자인플라자까지 걸어서 둘러볼 수 있다. 을지로 3가 근처의 맛집들, 종로 3가 근처의 세운상가와 종묘, 종로 5가 근처의 광장시장과 동대문시장을 함께 둘러보자.

을지로

산업화 시대 골목의 재탄생

한때 을지로는 공장과 상점들이 밀집한 서울 산업의 중심지였다. 수십 년간 명맥을 이어온 인쇄소와 조명가게, 금속 공장들이 옹기종기 모여 낡은 추억을 되새김질하던 좁은 골목길이 언제부터인가 매력적인 공간으로 변신했다. 젊은 예술가들과 사업가들이 낡은 공장 건물들 사이에 둥지를 틀고, 카페와 바, 갤러리를 열었다. 화려한 네온사인이 골목길을 밝히고, 벽화가 그려진 건물들은 삭막했던 도시 풍경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을지로는 ‘힙지로’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독특한 분위기를 찾는 이들을 ‘노가리 골목’에 불러모았다. 발걸음을 옮길수록 옛 모습과 새로운 감각이 교차한다. 기존의 산업 생태계를 보존하면서도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공존의 철학이야말로 을지로의 힙한 매력이다.

을지로의 옛 골목이 궁금하다면 방산시장 뒤쪽에서 세운상가까지 걸어본다. 은주정과 보건옥, 우래옥이 여전하다. 노가리 골목에서 만선호프와 경쟁하던 원조 노가리집인 을지OB베어가 다행히 사라지지 않고 근처로 자리를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