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쓸모

사람들이 엮어낸
‘일상’이라는 아카이브

당장 어제의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을 땐 일기를 써 보자.
백 년이 흐른 뒤에도 기록은 남으니까. 세월 속 사람들이 써 내려간 기억의 발자국을 따라가 본다.

📝글. 조수빈

최초의 브이로그

브이로그는 비디오(Video)와 블로그(Blog)의 합성어로 일종의 영상으로 남기는 일기이다. 남의 일기장을 엿본다는 호기심과 더불어 평범한 일상에 대한 공감, 대리만족의 쾌감 등의 심리가 브이로그의 열풍을 거세게 만들고 있다. 브이로그를 요즘 들어 등장한 새로운 콘텐츠라 느낄 수 있지만, 사실 그 시초는 약 4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때는 1989년. 한 남자가 친구와 함께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수다를 떨고, 주유소에 들러 기름을 넣는다. 다시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동네 풍경을 비추고, 마지막으로는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를 사 집으로 돌아간다. 이 모든 과정을 카메라에 담으며 카메라를 향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는 이는 바로 미국의 비디오 예술가인 넬슨 설리번이다. 그가 여행 중 남긴 이 기록은 무려 1989년도의 영상으로 지금의 브이로그와 매우 흡사한 방식으로 편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그는 뉴욕에 위치한 자신의 집 주변 풍경 등을 영상 일기로 남겼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기록의 주된 매체는 ‘글’과 ‘사진’이었고, ‘영상’은 부차적인 콘텐츠일 뿐이었다. 그러다 2010년대 중후반에 들어 유튜브 시장이 본격적으로 성장하면서 개인용 비디오 기록, 일명 브이로그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전쟁통에 남겨진
육아일기

“1938년 7월 4일. 아기의 이름은 ‘제시’라고 지었다. (…) 세상에 나온 걸 축하한다. 우리 제시!”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8년 중국으로 건너간 독립운동가 부부 사이에서 딸이 태어났다. 이름은 제시. 이후 8년간 딸 제시의 성장을 담은 육아일기가 『제시의 일기』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이 육아일기를 남긴 부부는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양우조, 최선화 부부다. 이들이 1938년부터 1946년 환국 때까지 써내려간 일기 속에는 초보 부모의 서툰 모습을 비롯해 딸 제시를 키우며 느낀 감정, 자녀 교육에 대한 고민 등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여기에 독립운동과 육아를 동시에 해야 했던 고단했던 상황도 생생하게 들어 있는데 그리 암울하지만은 않다. 가족 사이에서 피어난 작은 행복이 더욱 따뜻하게 느껴질 뿐이다. 무려 80여 년 전, 전쟁통 속에서 더욱 소중했을 이들의 일상을 엿보자니 시대만 달랐지 지금 육아를 하는 초보 부모와 다를바 없게 느껴져 괜히 마음이 뭉클하기도, 웃음이 나기도 한다.
사실 이 육아일기는 아버지인 양우조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도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다. 1999년 그의 외손녀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는 데에서 기록이 가지는 ‘영원의 힘’을 다시금 알 수 있다.

어린 시절 일기란 이불을 둘러싸고 비밀스럽게 써 내려간 뒤 누가 볼세라 서랍 저 구석에 밀어 넣는 게 당연한 존재였다. 특별할 것 없는 나날의 기록일지라도 나의 내면 가장 깊은 곳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가장 믿을만한 창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 일기는 더이상 비밀이 아니다. 자신의 사생활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취향을 공유하며 공감 버튼을 주고받는 게 하나의 재미로 자리 잡고 있다.
가장 사적인 영역을 드러내는데 거리낌이 없어진 이유는 기록형 소셜미디어인 SNS의 역할이 크다. 일상을 ‘노출’한다기보다 ‘공유’한다는 의미가 강해졌기 때문이다. 비단 사진이나 영상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일기 플랫폼의 양대산맥인 ‘네이버 블로그’와 ‘카카오 브런치’가 활성화되면서 글로 하루를 기록하기가 쉬워진 데다 네이버 블로그는 ‘오늘 일기 챌린지’를 통해 하루에 하나의 글을 남기는 것을 마치 놀이처럼 유행시켰고, 카카오 브런치는 ‘글이 작품이 되는 공간’이라는 슬로건 아래 글쓰기 본연에 집중하며 일기를 쓰는 개개인을 한 명의 작가처럼 대했다. 이처럼 사람들은 ‘기록’과 ‘공유’ 그 사이 어디쯤에서 새로운 재미를 찾아 나가고 있다. 그러니 바야흐로 일기의 시대가 다시 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돌아온 일기의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