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적 사유
새로운 길 앞에 선
당신에게
📝글. 김지용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새로운 꿈을 꾸는 사람들
한 해가 끝나가는 시기에 진료실에서 유독 더 많이 듣게 되는 말들이 있다. 가장 많이 듣는 말은 한 해에 대한 회한이다. 어떤 선택을 해도 후회가 따라오는 것이 사람 마음의 특성이라지만, 우울증에서는 부정적 사고와 과도한 자책이 증상으로 동반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다음으로 많이 듣는 말은 새해에 대한 다양한 걱정들이다. 우울과 불안은 동전의 양면처럼 애초에 떨어질 수 없는 것이어서 세트로 사람을 괴롭힌다. 이 회한과 걱정에 사로잡힌, 즉 과거와 미래에만 머무르며 괴로워하고 있는 마음을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르도록 돌리는 일이 내 직업이다. 주변의 상황이 바뀌지 않아도 자책하며 스스로를 괴롭히는 시간은 줄어들도록, 미래의 불확실성으로부터 약간 더 담담해질 수 있도록, 그래서 조금은 더 삶이 살 만해지도록.
쉽지 않은 일이지만 한 해 동안 이 마음의 방향을 돌리는 작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온 분들로부터는 다른 이야기들을 듣게 된다. 무언가 새로운 걸 하고 싶거나, 더 괜찮은 사람으로 변화하고 싶다는 이야기. ‘헬스장을 등록한 뒤 꾸준히 가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제 힘으로 현실을 바꾸고 싶어요. 꼭 이직에 성공할 거예요.’, ‘너무 성취에만 몰두해왔는데, 새해에는 빈 시간에 마음 편히 쉴 줄 아는 사람이 되어 보려고요.’, ‘힘든 시기에 절 도와주는 사람들을 보면서 느꼈어요. 내가 너무 나 자신만 보며 살아왔다는 걸요. 새해에는 정기적으로 봉사활동도 다녀보려고 해요.’ 등등. 무기력과 무망감에서 벗어난 이 모든 말들이 반갑다.
새해에는 달라질 수 있을까?
나 역시 새해에는 변화하고 싶다. 오랜 나쁜 습관인 지각도 깨끗이 사라지면 좋겠고, 더 이상 일도 미루지 않았으면 좋겠고, 무의미하게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시간도 확 줄었으면 좋겠다. 이러한 변화들을 바탕으로 더 좋은 정신과 의사, 더 좋은 아빠가 되었으면 좋겠다. 적다 보니 소망들이 더 떠오른다. 지난해 야심 차게 내놓은 책의 반응이 기대에 비해 다소 아쉬웠던 만큼, 앞으로 출간하게 될 책은 더 잘 준비해보고 싶다. 지난해 처음으로 출전했던 40대부 농구대회에서 최악의 플레이들을 연발하며 팀원들에게 미안했던 만큼, 젊은 축에 속하는 기간이 더 줄어들기 전에 새해에는 꼭 더 잘해보고 싶다.
그런데 그동안 너무도 당연하게만 여겨왔던 새해 소망들에 대해서 몇 가지 의문점이 든다. 왜 굳이 ‘새해에는’이라는 단서를 다는 걸까? 지금부터 변하면 될 것을. 또, 솔직히 이게 다 가능할까? 오랜 기간 지속되어 온, 잘 바뀌지 않는 내 모습인데 ‘새로운 나’로 환골탈태가 가능할까?
사람은 바뀔까? 사람은 안 바뀐다는 말들이 많지만, 다양한 사람을 오랫동안 지켜보는 정신과 의사의 경험으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사람은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가 가능하다. 하지만 매우 어렵고 변화의 속도는 느리며, 그 폭이 제한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동안 우리가 꿈꾼 변화들은 대부분 실패해왔을 것이며, 올해의 시도들도 아마 잘 안 되리라는 것을 우리 모두 내심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바뀌고 싶기에 또 꿈꾼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자책은 괴로우니까. 이제는 날 그만 미워하고 싶기에.
그래서 반복된 실패에도 간절함을 담아 올해 또 한 번 도전한다. 그만큼 간절하기에 이 세계의 시간 선이 바뀌는 그 마술적 순간의 힘에 기대보기도 한다. 사실 그저 똑같은 하루이지만 그래도 2025년의 이 세계와 한 살 더 먹은 나는, 2024년과 다를 것이라 기대해본다. 한 해의 끝이 다가올 때 다 같이 카운트다운을 세고, 시곗바늘이 자정을 넘어가는 순간 환호성을 지르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하는 마음속에는 이러한 마술적 소망들이 숨어 있다.
매년 낙담하면서도 결국 꺾이지 않고
이어져 지금 이 순간, 또 새로운 꿈을 꾸고 있는 내 안의 힘을 믿자.
그 힘을 바탕으로 조금씩 작은 변화들을 쌓아보자.
그럼에도, 계속 나아갈 용기
“선생님 T죠?(MBTI의 F와 T 중)” 진료실에서 종종 듣는 말이다. 환자분들에게 공감하려 노력하지만, 동시에 한 발짝 떨어져 냉철하게 해석해야만 하는 직업의 특성상 내가 건네는 말이 차갑게 느껴질 때가 있나 보다. 지금 적고 있는 이 글 역시 그렇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고통 없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고 있기에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지는 한 해 되세요!’라는 글은 차마 적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었던 『이중 하나는 거짓말』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김애란 작가는 이렇게 글을 맺는다. ‘삶은 가차 없고 우리에게 계속 상처를 입힐 테지만 그럼에도 우리 모두 마지막에 좋은 이야기를 남기고, 의미 있는 이야기 속에 머물다 떠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노력하겠습니다.’라고.
그렇다. 삶은 원래 가차 없다. 가차 없이 우리의 삶을, 평온하게 살기 바라는 우리의 소망을 깨뜨리고 또 깨뜨린다. 그 사실을 나는 매일같이 진료실에서 목격한다. 새해에도 고통은 또 찾아올 것이고, 우리는 그 고통 속에 했던 대로 반응할 것이다. 달콤한 새해 소망을 꿈꾸는 것도 물론 좋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건 새해에도 절망하지 말자는 것이다. 좌절은 종말이 아닌 일상이니. 매년 낙담하면서도 결국 꺾이지 않고 이어져 지금 이 순간, 또 새로운 꿈을 꾸고 있는 내 안의 힘을 믿자. 그 힘을 바탕으로 조금씩 작은 변화들을 쌓아보자. 꿈꾸는 대로 되지는 않더라도 그 속에서 좋은 이야기들을, 의미 있는 이야기들을 써 내려가 보자. 나 역시 그렇게 노력할 것이다. 그렇게 노력하는 새해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