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지구

바람이 업은 불씨

📝글. 이세흠 KBS 기상재난전문기자

  • 겨울부터 봄까지 이어지는, 이른바 ‘산불 시즌’이 끝났습니다. 봄이 되면 한반도까지 남하했던 시베리아 고기압은 점차 세력을 잃고, 분리된 세력이 이동성 고기압으로 바뀌어 한반도 남쪽으로 흘러갑니다. 이때 우리나라로는 강하고 건조한 서풍이 유입되는데, 이 바람이 산맥을 넘으면서 더욱 고온 건조해집니다. 특히 강원과 경북의 산지와 동해안 지역은 실효습도가 20%대로 떨어지고, 건조특보가 내려집니다. 초목과 낙엽이 바싹 마르고 건조하니, 산불을 조심하라는 기사가 쏟아져 나오는 시기입니다.
  • 올해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하루에 30건이 넘는 산불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고, 그중 경북 의성에서 시작돼 경북 북부 전역을 삼킨 초대형 산불은 이런 기상 조건이 맞물린 결과였습니다. 고기압이 자주 지났던 지난겨울 경북의 강수량은 지난해의 10분의 1 수준에 불과했고, 산림은 극도로 건조해졌습니다.
    의성 산불이 동쪽으로 수십km를 확산한 3월 25일, 기상청 자동기상관측시스템(AWS) 자료에서 경북 대부분 지역의 순간 풍속은 초속 15m를 넘었고, 영덕에서는 초속 25m의 태풍급 강풍이 관측됐습니다. 산 정상부의 풍속은 지상보다 서너 배 강했고, “불씨가 산을 넘어 다녔다.”라는 주민들의 증언도 잇따랐습니다.
  • 산불이 번지는 속도는 사람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습니다. 급속도로 확산한 산불과 강풍 탓에 산림청은 피해 면적 집계를 멈췄고, 기존의 산불 상황도는 의미를 잃었습니다. 산림청의 산불 상황도를 대체하기 위해 열어본 천리안 위성영상에선, 화선(火線)이 이미 동해안까지 도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자료가 잘못된 게 아닐까?’ 저녁까지만 해도 안동과 의성에 머물렀던 화선이 밤이 되자 영덕의 동쪽 끝 해안가까지 도달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습니다. 위성영상으로 추정한 산불의 위치를 특보에 사용할지 내부 논의도 거치고 위성센터와 여러 차례 통화했지만, 너무 급격히 번진 산불에 대한 의심 탓에 끝내 쓰지 못했습니다.
    곧 영덕 전역에 재난문자가 발송됐고 통신이 끊긴 영덕에서는 간헐적인 제보가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위성 영상대로, 불은 정말로 영덕을 가로질러 동해안에 닿아 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들어온 영상에선 바닷가 마을 전체가 불에 탔고, 선박과 양식장이 전소돼 있었습니다. 바람이 실어 나른 이번 산불은 경북에서만 9만 9천 헥타르의 산림을 태우고 역대 최악의 산불로 기록됐습니다.
  • 기상 지표들은 산불을 더욱 키우고, 산불 발생 위험기간을 더욱 늘리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산불이 발생한 3월 말, 전국 평균기온은 14.2℃로 역대 가장 높았고, 경북 지역의 상대습도는 평년보다 15% 포인트 이상 크게 낮았습니다. 편차는 있지만, 최근 몇 년 사이 변화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습니다.
    국립산림과학원에 따르면 이번 3월 대형 산불로 발생한 온실가스는 이산화탄소로 환산했을 때 760만 톤이 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는 우리 국민 1인당 온실가스 배출량인 약 14톤을 기준으로, 55만 명이 1년간 배출하는 수준입니다. 산불이 기후변화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수치입니다. 산불이 기후변화의 결과이자 원인으로 다시 작용한 셈입니다.
  • 대형 산불이 발생한 지 두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100명이 넘는 이재민이 여전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산불은 자연재난이 아닌, 부주의한 불씨에서 시작되는 ‘인재(人災)’입니다. 단순한 슬로건인 ‘산불 조심’은 이제 작은 실천이 아닌, 기후위기 대응의 중요한 실천이 됐습니다.
  • ‘산불 조심’은
    이제 기후위기 대응의 중요한 실천이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