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적 사유

무언가 지키겠다는
정의로운 마음

📝글. 변지영 임상·상담심리학자

정의는 어디에 있나

길을 걷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보면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몸이 움직인다. 우리는 종종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주저 없이 나선다. 때로는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를 위해서도 나선다. 그것은 가족일 수도, 공동체일 수도, 혹은 이름 없는 타자의 목소리일 수도 있다. 이처럼 손익 계산으로 설명되지 않는 감각이 우리를 움직인다. 그것은 이미 지나가버린 일에 대한 책임감이자,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향해 응답하려는 몸짓처럼 보인다.
정의에 대한 감각은 지금의 법과 제도로는 온전히 포착되지 않는다. 정의는 언제나 기준 바깥에서 온다. 지금, 여기의 언어로는 정의를 완전히 설명할 수 없기에 아직 도달하지 않은 어떤 것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바로 그 부재 속에서 오히려 더 선명하게 정의를 느낀다. 어떤 고통 앞에서, 어떤 부정 앞에서, 우리는 그것이 정의롭지 않다는 것을 즉각적으로 안다. 그 감각은 몸에 새겨진 과거의 흔적이자,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반드시 와야 할 미래의 요청에서 비롯된다.

이렇게 보면, 정의로운 마음이란 실재하는 것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지 않는 것에 응답하는 감수성이다. 때로는 꿈처럼, 때로는 죄책감처럼, 때로는 설명할 수 없는 책임감처럼. 우리는 그것에 사로잡히고, 그것에 의해 움직인다. 마치 무언가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듯이, 어떤 일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았다고 속삭이듯이.
따라서 정의로운 마음은 과거의 부름과 미래의 예감 사이에 놓인 간극에서 생겨난다. 그리고 이 간극을 견디는 사람만이 무언가를 지키고자 하는 결심을 품게 된다. 그 결심은 확신보다는 망설임과 주저 속에서 빛난다. 바로 그 망설임 속에서 진정한 정의가 자라난다. 정의는 아직 전해지지 않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의는 언제나 미완의 과정이다

유령처럼 던져진 질문

개인이든 사회든, 모든 과거는 지금 여기에서 살아 움직인다. 역사가 보여주듯, 끝났다고 여겨진 일이나 잊혀졌다고 생각한 순간들은 되돌아온다. 어떤 목소리들은 침묵 속에서도 살아 있고, 어떤 상처들은 봉합된 듯 보이지만 여전히 아물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그러므로 정의는 하나의 사건으로 종결되지 않고 마주해야 할 것으로서 예고 없이 돌아온다. 불편한 불청객처럼 되돌아오는 시간 속에 미처 말해지지 못한 것들의 언어로 우리에게 묻는다. “듣고 있는가, 응답할 것인가?”
정의는 돌아오는 과거와 예기치 못한 미래의 틈에서 유령처럼 나타난다. 우리는 그 유령의 속삭임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과거에 충분히 애도되지 못한 죽음이자, 역사에서 지워진 고통이며, 아직 이름조차 얻지 못한 누군가의 부름이기 때문이다.
정의는 바로 그 유령들의 귀환을 허락하고, 귀환 앞에 책임 있게 응답하려는 윤리적 태도를 가질 때 가능해진다. “들을 것인가? 응답할 것인가?”라는 물음은 단지 과거를 반성하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망각하거나 배제한 목소리들이 여전히 우리 곁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 침묵에 귀 기울이며 함께 살아가려는 윤리적 결단이야말로, 정의를 가능하게 하는 토대다.

정의를 대하는 ‘알 수 없음’의 태도

‘정의를 위해’ 무언가를 몰아내자는 건 조금 위험한 태도다. 자기 확신에서 비롯된 윤리적 우월감은,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은 곧 적’이라는 배제의 논리로 이어지기 쉽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해서라는 ‘올바름’의 명분 아래 폭력을 정당화하고 질서와 정의를 내건 이데올로기. 우리는 그것이 오히려 정의를 말살해 온 역사를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 밀란 쿤데라의 소설 『웃음과 망각의 책』에 담긴 문장처럼. “전체주의는 단지 지옥일 뿐만 아니라, 낙원의 꿈이기도 하다. 오랜 옛날부터 이어져 온 꿈, 곧 모두가 하나의 의지와 믿음 아래 조화를 이루고, 서로에게 아무 비밀 없이 살아가는 그런 세계에 대한 꿈 말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정의는 선과 악, 옳고 그름을 명확히 가르는 이항대립의 게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알 수 없음’의 마음으로 경청할 때 정의는 가능해진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관철하는 힘이 아니라, 자신이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감각을 끝까지 놓지 않는 태도가 필요할 것이다.
주장보다 경청, 확신보다 주저함에 가까운 마음은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고, 타인의 고통과 목소리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게 만든다. 정의는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언제나 미완의 과정이다. 우리는 그 과정 속에서 계속해서 묻고, 듣고, 흔들리며 나아가야 한다. 정의는 예측 가능한 질서로 닫아버리는 것이 아니라, 질문과 응답으로 열어두는 것이다. 모든 혼란은, 아직 해석되지 않은 가능성일 테니 말이다.

정의는 돌아오는 과거와 예기치 못한 미래의 틈에서 유령처럼 나타난다.
그것은 과거에 충분히 애도되지 못한 죽음이자, 역사에서 지워진 고통이며,
아직 이름조차 얻지 못한 누군가의 부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