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쓸모

그 옛날,
나라를 지킨 사람들

역사는 언제나 나라를 지키기 위해 애쓴 사람들의 발자취로 채워져 있다.
그들의 용기와 희생은 단지 위기 속에서의 승리를 넘어서,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굳건히 하는 밑거름이 되어왔다.
지금부터 그들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글. 조수빈

우리 언어를 지키기 위한 여정

지금껏 우리말을 쉽게 배우고 누릴 수 있었던 것은 한글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일제강점기에 우리 언어를 지키기 위한 숨겨진 영웅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1911년 일제강점기 조선의 말과 글을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주시경 선생을 중심으로 이희승, 김윤경 등 젊은 학자들이 모여 우리말 사전인 ‘말모이’의 편찬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다 4년 만에 주시경 선생이 돌아가시면서 작업이 중단됐다. 다행히도 그의 뜻을 ‘조선어학회’가 이어받아 각종 신문과 잡지, 소설, 역사책 등에 쓰여있는 낱말을 모은 뒤 뜻을 풀이하고, 단어의 형태와 표준을 정하는 등 13년 동안 사전 편찬 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위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1937년,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을 조선어학회도 피하지 못했던 것.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전 편찬원이었던 정태진 선생을 비롯한 33명의 회원들이 ‘문화적 독립운동’이라는 죄목으로 검거되어 3여 년 동안 투옥의 고초를 겪어야 했다.
결국 학회는 해산되었고 편찬 중이던 원고의 일부도 사라졌다. 그런데 광복 이후 압수되었던 원고가 경성역(서울역) 운송부 창고에 방치되어 있던 것이 발견되었고, 1947년 10월 9일, 마침내 <조선말 큰사전> 첫 권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거주문화를 지키기 위해 지어진 마을

1920년 일제의 회사령(會社令)이 폐지되고 일본 자본이 조선으로 유입되자 우리 민족 자본은 큰 위기에 처했다. 당시 일본인들은 명동이나 용산 일대 남촌에서 거주하고 있었는데, 점차 종로 일대로 상업활동을 확장하며 주거지 역시 북촌을 침범하기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20년대 들어 경성의 거주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기에 이를 감당할 소규모 주택들이 필요했다.
일제의 잠식을 우려했던 독립운동가 정세권 선생은 부동산 프로젝트를 계획했다. 그는 전통한옥을 변형해 현대적으로 개량한 소규모 한옥을 떠올렸다. 당시 북촌에 거주했던 권세가(權勢家)들이 자신의 한옥을 내놓았는데, 그것을 정세권 선생이 구매한 후 전통한옥 구조인 ‘ㅁ’자 안에 소규모 개량형 한옥을 만들었다. 분양대금을 낮춰 조선인들에게 분양했으며, 일시불은 물론 분납제를 도입해 주택 구입의 부담 또한 낮췄다.
그는 부동산사업뿐만 아니라 조선물산장려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일본의 억압 속에서 우리말 사전을 편찬했던 조선어학회에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는 2층 양옥을 지어 기증하기도 했다. 다시 말해 정세권 선생의 프로젝트는 우리 민족들에게 비록 국권은 침탈되었으나 일상을 지켜내고 있다는 위로이자 자긍심이었다.

우리나라 문화재를 지킨 경찰

전쟁은 인명뿐 아니라 그 지역의 유적을 모조리 불태우고 만다. 6.25 전쟁 또한 우리나라의 많은 문화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특히 오랜 세월 전해져 온 소중한 불교 문화유산들이 훼손되거나 소실됐다. 그러나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자신의 목숨보다 문화재를 더 소중히 여기며 천년 고찰을 지켜낸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차일혁 경무관이다.
1951년 5월, 8사단 대대장이었던 방득윤 대대장은 상부로부터 빨치산들의 근거지가 될 만한 사찰 및 암자를 소각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방득윤 대대장과 함께 지리산 화엄사 일대를 방어했던 차일혁 경무관은 화엄사를 불태우는 것에 매우 회의적이었다. 상부에서 내린 명령이었기에 어길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천년고찰을 태울 수도 없었다. 그는 고민 끝에 부하들을 시켜 화엄사의 문짝들만 떼어내 불태웠다.
차일혁 경무관은 “절을 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에는 천 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라고 항명했다. 이처럼 그가 발휘한 지혜로 오늘날 우리는 천년고찰 지리산 화엄사를 온전한 모습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