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water 水토리 : 한국수자원공사 웹진 2024. AUGUST VOL.677

K-water 水토리

본사 대전 이전 50주년 기념 시리즈
온 힘으로 만든 대전과의 인연

글 한국수자원공사 홍보실 박재현 사진 한국수자원공사 홍보실 제갈문필




4편: 선배님 인터뷰 ‘아직 못다 한 이야기들’

‘온 힘으로 만든 대전과의 인연’을 기획한 것은 봄기운 가득한 3월이었다. 우리 역사의 첫 페이지였던 선배들을 만나 본사 대전 이전의 기억을 듣기로 했다. 숨겨둔 보물을 찾는 심정으로 기록에 남지 않은 그 시절 이야기를 발견하고 싶었다.

선배들은 노구를 이끌고 기꺼이 후배들을 환대해 주셨다. 4월 17일 대전에서 김순원 선배님과 첫 만남을 가졌다. 이어 경기도 용인에서 박동관 선배님을 뵈었고, 서울에서는 강정길 선배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많은 기억이 쏟아졌고, 여러 감정이 뒤섞였다. 자신의 절정을 회상할 때 선배들의 눈빛은 청춘이었고, 50년의 세월이 담긴 말들은 자부심으로 물들어 있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평생 한길을 걷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선배들의 답은 평범하고 간결했다. 김순원 선배님에게는 자긍심이었고, 박동관 선배님에게는 꾸준함이었으며, 강정길 선배님은 최선을 다했다는 충만감이었다. 일생을 다해 얻은 것은 신묘한 이치가 아니었다. 매일 가슴에 새긴 작은 다짐들과 스스로를 믿게 해준 삶에 대한 태도였다.

이번 편은 선배들과 나눴던 여담을 풀었다. 풍선처럼 부풀어진 기억의 다발들 속에서 우리의 과거를 미래로 이어줄 매듭을 발견하는 몫은 독자들에게 맡긴다.


박동관 선배님과의
못다 한 이야기

‘공채 1기’ 최고의 인재만 모였다고 들었다.
당시 굉장한 실력자들이었어. 서울대 공대 출신이 거의 80%였고, 경륜이 있는 사람들도 많았지. 그때는 우리가 직접 설계했어. 민간 업체들은 오히려 우리에게 배워갔던 시절이지.

이전 당시 가족들 반응은?
신당동에 아내와 아이 둘하고 넷이서 살았어. 그냥 뭐 물어볼 것도 없이 내려왔지. 회사가 간다는 데 뭘 이야기해. 어쩔 수 없이 주말부부를 하게 된 거지.

집을 담보로 사옥 계약금을 마련하셨는데,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사옥 부지 계약금이 없는데 어떻게든 마련해줄 수 없겠냐고 했었어. 그때 내가 총무과장과 관제과장을 겸직하고 있었거든. 그 당시 우리는 참 책임감, 의무감이 강했어.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 무조건 하는 거야. 신당동 집을 담보로 잡았지.

당시 사모님은 모르셨다고.
상의하지 않았어. 내 임무니까. 나중에 들통났지. 총무과장을 마치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 사이에 회사에서 몇 달간 이자가 나가지 않은 거야. 은행이 집으로 통지했지. 집사람에게 전화해서 설명하니 학을 뗐어.

매일 야근이 일상이었다고 하셨다.
사명감 넘치던 시절이야. 근무 시간 구별 없이 12시 넘도록 일할 때가 많았지. 계산 없이 그냥 천직이라 생각하고 몰입했어.

고단함을 감내하신 일들이 지금 우리의 초석이 되었다.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지. 우리가 근무했을 때만 해도 꾸준하게 근무하는 사람을 높이 평가했어. 돌아보면 모든 업무에 큰 의미를 두기보다 그냥 꾸준히 했을 뿐이야. 꾸준하게 하면 뭐든 이루는 거지.

가장 뿌듯한 일이 있다면.
대전 이전 당시 터를 닦을 때 지금 본사에 있는 나무는 전부 내가 심었어. 그때 심은 나무들이 지금 후배들에게 그늘을 주는 걸 보면 뿌듯하더라고.

은퇴 후 바라본 회사는?
지금 후배들이 굉장히 잘하는 것 같아. 좀 앞서가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글로벌 트렌드에 맞춰서 외국 진출도 하는 것 같고. 후배들 잘하는 모습 보면 우리가 자랑스러워지지.




김순원 선배님과의
못다 한 이야기

만나자마자 한국수자원공사는 ‘자긍심’이라고 강조하셨다.
물을 잘 관리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우리 공사가 생겼어. 국가적 필요로 생겼기 때문에 어디를 가도 수자원공사에서 근무한다는 것에 자긍심이 있었지. 지금까지도 수자원공사 직원이었던 것을 흐뭇하게 생각하고 한평생 긍지를 가지고 살아가.

대전으로 내려올 때 가족들 반응은?
서울에서 다섯 식구가 살았어. 처음엔 당황했지. 서울을 두고 어떻게 시골로 가냐고. 그래도 회사가 좋으니까 아내도 내 뜻을 따르더라고.

본사를 대구로 이전했다면?
아마 안 갔을 것 같아(웃음).

본사 이전으로 대전이 덕을 봤다고 하셨다.
대전 시내에서 밥 먹고 술 한잔하면서 큰소리치는 건 다 우리 직원들이었어. 은행들도 공사와 연을 만들려고 난리가 났지. 대전 경제가 활성화되는 것 같더라고.

올해 91살이시다. 건강 비결은?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생활하는 거지. 감사하지 않으면 마음이 많이 흔들리고 안정감이 사라져서 건강할 수 없어. 젊을 때부터 회사에서 매사 긍지를 가지고 열심히 일해서 노후에도 건강한 것 같아.

은퇴 이후 바라본 회사는?
난 수자원공사와 더불어 평생 꿈을 같이 꿨어. 주어진 업무에 만족하고 즐겁게 다녔지. 67년에 입사해 정년퇴임까지 다른 생각하지 않았어. 다시 돌아가도 수자원공사를 선택할 거야. 자긍심을 갖게 해줬으니까.

30대였던 시절로 돌아간다면?
흐름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판단력 빠르게 안정적으로 잘해가고 있는 것 같아. 성공적으로 잘해 온 경험들이 쌓여있기 때문에 안정적인 사고를 갖게 된 것이라 생각해.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
정직하고 매사에 충실했으면 좋겠어. 그러다 보면 다른 이들에게 모범이 되고, 인정을 받게 되지. 자기 뜻을 이루려면 동료들과 타협과 협치를 이룰 수 있어야 해. 매사에 정직하고 최선을 다해 감사하게 생활하면 원하는 건 반드시 이뤄지게 마련이야.




강정길 선배님과의
못다 한 이야기

입사 당시 원양어선을 타는 줄 알았다고 하셨다.
‘수자원’이란 용어가 없었던 시절이었어. 수산자원을 다루는 곳인 줄 알았지. 원양어선을 타고 나가는 줄 알았어.

퇴근 후 삼삼오오 다니셨다고 했는데, 주로 가신 단골 식당은?
퇴근하면 무조건 은행동 홍명상가 쪽으로 나갔어. 태화장에 많이 갔고 왕비성도 단골이었고. 이전 충남도청 근처에 있던 미락이랑 선화동 고려회관도 기억나네.

직원들이 사택 백조대를 믿고 돈을 모으지 않았다고 하셨다.
백조대가 있으니 내 집 마련할 생각들을 안 하고 돈을 많이 썼지. 그러다 80년대 들어서면서 자산을 모아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생겼어. 마침 사내 주택자금 대출 제도가 생겨서 직원들이 하나둘 자가를 마련했지.

‘한국을 움직이는 인물들’에 이름을 올리셨다.
중앙일보에서 편찬한 책이야. 내 이름이 올라갔다는 것은 사실 수자원공사의 이름이 올라간 것과 같아. 우리 회사가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후배들이 꼭 알아줬으면 해.

은퇴 후 바라본 회사는?
회사를 떠난 지 20년이 지났는데 점점 더 발전하는 것 같아. 내가 떠나면 다 끝날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다 후배들이 고생해준 덕분이지. 잘해줘서 고맙고 기특해.

회사 분위기도 많이 변한 것 같다고.
사보를 통해 회사 분위기를 느끼는 데 상당히 자유로워진 것 같아. 사진만 봐도 과거엔 고참과 단장이 제일 앞이었는데 이제는 직원들이 주인공이더라고. 후배들 얼굴 보면 전부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워.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한 말씀.
서로 스트레스 주지 않았으면 좋겠어. 다 사람이 하는 일이야. 내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보람된 일이라 생각하는 것도 중요해. 정말로 여러분이 우리 회사를 더 훌륭하게 만들어 줬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