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人지도

자연의 고운 빛깔을
길어 올리며

계절을 색깔로 말하자면 봄은 분홍색, 여름은 초록색, 가을은 주황색, 겨울은 하얀색 쯤으로 말하고 싶다.
그렇다면 담양은 어떤 색일까. 한 폭의 천을 담양으로 물들이는 유민영 작가를 만났다. 그가 옮겨둔 담양의 색을 만나본다. 천연염색 작가 유민영

📝글. 조수빈  /  📷사진. 박재우

제대로 가르치고 싶다는 마음

담양 죽녹원에서 차로 십 분을 달려 도착한 염색 공방에는 아직 연둣빛 잔디가 채 깔리기 전인 너른 마당에 곱게 물든 천이 줄 하나에 몸을 맡긴 채로 바람에 나부끼며 이른 봄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전 작업을 마친 유민영 작가와 어머니 임춘옥 씨가 총천연색 풍경 아래에서 달콤한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천연염색을 먼저 시작했던 건 어머니 임춘옥 씨였다. 취미 삼아 하던 게 조금씩 입소문이 나면서 제품 주문, 클래스 문의가 들어오기 시작했고 일손이 부족했던 어머니께서 유 작가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 어머니께 천연염색하는 방법에 대해 속성으로 배워 수업 보조를 하기 시작한 유 작가. 그런데 누군가를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배움에 대한 갈증이 깊어졌단다. “수업을 하다 질문을 받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제 대답에 깊이가 없다고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좀 더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물론 일이 재미있기도 했고요. 본격적으로 배워보자 싶어 천연염색 전문가 과정을 밟게 되었어요”
어머니 어깨너머로 배운 게 전부였던 그에게 전문가 과정은 차원이 다른 세계였다. “첫 수업부터 화학을 배우더라고요. 천연염색이란 재료의 화학 반응을 활용하는 일이었기에 화학의 기본 지식을 알아야 했거든요. ‘큰일 났다’ 싶었죠. 사실 제가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했었는데도, 화학을 배우는 데 꽤 애를 먹었어요. 대학 다닐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던 것 같아요.”

작가로서 어머니와 어깨를 나란히 하다

나뭇잎, 꽃잎, 식물 뿌리 등 천연염색의 모든 재료는 자연에서 온다. 재료에서 색을 추출하는 방법에는 알코올을 이용하거나 물에 끓이는 방식이 있고, 이후 염료에 원단을 담가 손으로 주무르거나, 온도를 미세하게 조절해가며 오랜 시간 달이면 하얗던 원단이 알록달록한 색을 띠게 된다. 글로 나열하자면 간단해 보이지만, 사실 원단에 묻어 있는 미세한 불순물을 씻어내는 작업과 염료와 섬유가 잘 염착 되도록 하는 매염 과정 등 보이지 않는 손길이 많이 필요하다. 이러한 과정을 모두 거쳐야 하기에 원단 하나를 염색하는데 꼬박 3~4일이 걸린다.
염색이 완료된 다음 스카프, 티셔츠, 동전 지갑, 모자 등 제품을 개발하고 제작하는 것 또한 유 작가가 모두 직접 하고 있다. 천연염색 일이 이토록 복잡하고 섬세한 일이라는 것을 그도 직접 몸담아 본 후에야 알았다.
“사실 어머니를 도와서 할 때는 정해진 일만 했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좋아하는 원단, 색깔, 디자인 등을 활용해 만들다 보니 점점 재미가 느껴지더라고요. 머릿속에 상상하던 걸 직접 작품으로 만들어낼 때의 쾌감도 있고요. 제가 만든 모든 작품이 나를 표현하는 것 같아 애착이 가요.”
전문가 과정을 수료한 후 그는 어머니와 함께 공방을 운영하고 있다. ‘보조’의 입장에서 일하다 동등한 입장에서 작업하기는 처음이라 우여곡절도 많았다. 하지만 이제 두 사람은 ‘모녀’이자 ‘동료’로서 서로 조언을 주고받으며 공방의 내실을 단단하게 다져 나가고 있다.

자연을 계산하는 일

‘천연’염색이니 당연히 초록 잎에선 초록색이, 빨간 꽃에선 빨간색이, 노란 꽃에선 노란색이 추출될 거라 생각하겠지만, 모든 재료가 눈에 보이는 색 그대로 추출되지는 않는단다. 붉은 동백꽃은 연한 노란색을, 짙은 갈색의 양파 뿌리는 미색을 뿜어낸다. 댓잎에서는 연한 노란색부터 연한 녹색까지 추출되는데, 여기에 푸른 계열의 색을 섞어야 댓잎 같은 싱그러운 초록색이 된다고. “천연염색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 고유의 색을 만나는 일이에요. 그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색깔인 거죠. 그러면서도 참 계산적인 일이기도 해요. 같은 잎이라도 모두 다른 초록색을 띠듯 천연염색을 하면 매번 다른 색이 나올 것 같지만 그렇지 않거든요. 재료와 원단에 따라 물의 온도, 염색 시간까지 철저히 계산해서 작업하기 때문에 대부분 생각하는 색이 그대로 나와요.”
하지만 작업자에 따라서는 그 결과물이 천차만별로 나온다. 유 작가의 시그니처는 ‘화사함’이다. “‘천연염색’ 하면 쪽빛이나 황토색을 흔히 떠올리는데요. 저는 색을 하나만 쓰는 건 재미가 없더라고요. 천 하나에 파랑, 노랑, 빨강, 보라 등 여러 색을 섞어 쓰려고 하는 편이에요. 스카프 하나에도 여러 색을 활용하면 마치 무지개를 두른 듯 툭 걸치기만 해도 화사해요. 단골 중에 화사하고 오묘한 색감을 보면 ‘딱 민영 쌤 색깔이네.’라고 말씀해주시는데, 그럴 때마다 기분이 좋아요.”
여기저기서 고개를 든 새순과 꽃망울이 인사하는 계절, 봄이 오면 유 작가는 더욱 바빠진다. 산들바람과 봄볕의 열렬한 응원 속에서 자신도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단다.
그의 손짓에 새하얀 세상이 물들어가고 있다. 자연을 바라보는 유 작가의 시선을 닮아 따스하고도 영롱한 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