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적 사유

함께 크는
개와 사람의 세상

📝글. 김신회 작가

목숨보다 소중한 존재

며칠 전, 옆 동네에서 누군가가 개를 잃어버렸다는 소식이 들렸다. 출장 때문에 지인 집에 며칠 맡겨둔 개가, 잠시 열린 문 사이로 뛰어나갔다고 한다. 해가 지면 여전히 쌀쌀한 날씨에 맨몸으로 거리를 배회 중이라고 한다.
아는 개는 아니지만 혹시 마주치지 않을까 싶어 외출할 때마다 두리번거렸는데, 오늘은 우리 집 공동현관 앞에도 전단지가 붙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을 짓고 있는 개의 사진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 앞에 한참을 서 있으니 풋콩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부모들이 하는 ‘목숨보다 소중한 아이’라는 말을 그동안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으레 접하는 관용구처럼 들렸고, ‘부모라면 그렇겠지’ 짐작만 했다. 하지만 풋콩이와 함께 살고 나서부터는 절로 마음에 스민다. 나는 풋콩이를 위해 죽을 수 있지만 죽을 수 없다. 풋콩이를 놔두고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가장 바람직한(!) 소원은, 내 수명을 반쯤 떼어 풋콩이랑 나눠 갖고 싶다.

보호자에서 엄마가 되기까지

개에게 세상의 전부는 보호자이지만, 보호자의 세상 역시 개가 전부다. 인간이 개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고 베풀어주고, 흔히 하는 말처럼 ‘산책을 시켜주고’, ‘놀아준다’ 라고 하지만 개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인간에게 준다. 이 개는 나 없이도 잘 살겠지만, 나는 이 개 없이 잘 살지 모르겠다. 살면서 이만큼 행복을 안겨 준 존재는 없었다. 이런 말이 누군가에게는 ‘목숨보다 소중한 아이’ 에 대한 이야기로 들리겠지.
풋콩이는 나의 첫 반려견이다. 약 오 년 전, 슬개골이 탈구된 채 공항에 버려진 한 살 추정 강아지였던 ‘리나’. 이후 시 보호소에 입소해 안락사를 앞두고 있던 리나는 동물보호단체에 의해 구조되었고, 여러 곳에서의 임시보호를 거쳐 나의 가족이 되었다.
풋콩이가 된 리나와 함께 살기 시작하고 나서 가장 많이 한 생각은 ‘힘들다’였다. 하루라도 빨리 서로 적응하고 싶어서 수시로 산책하고 교육하는 동안 기쁨보다 피로감이 컸다. 아무리 가르쳐줘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개를 볼 때마다 ‘이걸 왜 몰라? 몇 번씩이나 알려준 걸 왜 못해?’ 하며 답답했다.
메마른 마음은 호칭에서도 드러났다. 개와 산책할 때마다 동네 어르신들은 우리를 보고 말을 걸었다. “엄마랑 산책 나왔구나?”, “아이구, 엄마만 보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 한 생각은 ‘엄마 아닌데…’였다. 나는 개에게 ‘엄마’ 아닌 ‘보호자’라는 호칭을 썼다. ‘보호자가 밥 줄게’, ‘보호자, 밖에 나갔다 올게?’라며 호칭이 아닌 역할을 이름으로 사용했다. ‘얘는 개일 뿐, 나는 개의 엄마가 아니야, 그냥 보호자야’라며 선을 그었다. 엄마라는 단어를 듣는 것도, 발음하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엄마라는 말은 왜 이리 무거울까. 두 음절 안에서 느껴지는 사랑과 희생, 눈물, 속상함, 미안함, 후회, 분노, 죄책감 등은 적어도 내 인생에 없는 것이길 바랐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되고 싶었던 적이 없다. 엄마는 늘 힘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행복과는 멀어 보이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자라면서 ‘엄마가 되면 불행해진다’라는 고정관념이 내 안에 뿌리박혔다.
결국 결혼과 출산을 하지 않고 살기로 했고, 그 다짐은 사람을 만나는 일에도 영향을 미쳤다. 사랑을 하고 싶다고 머리로만 생각할 뿐, 늘 보이지 않는 선을 긋고 상대를 대했다. 그런 내 모습에 상대방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외롭지 않았을까. 사실 그러고 있는 나도 외로웠다.
고민 끝에 개를 가족으로 맞았다. 사람으로 충족되지 않는 마음을 동물에 기대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툭하면 선을 긋는 습관에는 변함이 없었다. 나는 이 개의 엄마가 되지는 않을 거야. 이 개로 인해 불행해지지 않을 거야. 그 마음이 오히려 나를 더 불행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개는 사람을 고집대로 살게끔 내버려 두지 않는다. 아무리 네 엄마가 아니라고 주장해도 새끼처럼 파고든다. 잘못된 행동에 호되게 혼나고도 어느새 옆에 엉덩이를 대고 앉는다. 뭔가 마음에 안 들어 이빨을 드러내다가도 얼른 만져달라며 배를 까고 드러눕는다. 인간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행동들에 웃음을 터트리면서 점점 개에게 굴복했다. 풋콩이와 함께 산 지 삼 년이 되어갈 즈음,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다. “풋콩아, 엄마가 해줄게. 엄마한테 와 봐!”

풋콩이가 알려준 것들

어느 날, 동물을 사랑하는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왜 이렇게 동물을 좋아할까, 왜 동물은 예쁘기만 할까를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동물한테는 서운한 마음이 안 들어서인 것 같아요. 사람한테는 어쩔 수 없이 서운함이 생기잖아요. 왜 내 마음을 몰라줘, 내가 이렇게 했는데 넌 왜 그래, 하면서요. 그런데 동물한테는 그런 마음이 안 들죠. 잘못해도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니까.” 조금만 일찍 들었어도 다는 이해하지 못했을 그 말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그러고 보니 풋콩이에게 서운함을 느끼지 않게 되었을 때부터 나는 풋콩이에게 ‘엄마’라는 호칭을 썼던 것 같다. 이제는 풋콩이가 뭘 해도 귀엽다. 어떤 잘못을 해도 화가 나지 않는다. 아무리 줘도 부족한 것 같고, 미안한 마음만 든다. 어린 시절, 힘들게만 보였던 엄마도 분명 이런 마음으로 나를 키웠겠지.

‘나는 너를 보호하는 사람이야. 그게 바로 사랑한다는 뜻 아니겠어?’가 ‘나는 너를 사랑해. 나는 너의 엄마여서 좋아’가 되기까지 남들보다 긴 시간이 걸렸다. 엄마처럼 살지 않기 위해 이 악물어 온 시간을 지나 이제는 내 마음에 깃든 긍휼함에 오히려 내가 위로받는다. 더 오래전부터 개와 살았다면, 내가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 얼마큼인지 경험했더라면, 자연스레 결혼해 아이 엄마가 돼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덧 가족이 된 지 오 년이 지나 추정 나이 여섯 살이 된 풋콩이. 이제는 곯아떨어진 모습만 봐도 마음이 벅차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많이 흘렀는지. 앞으로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될지. 절로 떠오르는 안 좋은 생각들을 떨쳐내며 풋콩이를 쓰다듬는다. 내가 이 작은 개한테 서운함을 느꼈었다고? 화를 내고 다그쳤다고? 대체 왜? 훈련을 핑계로 충분히 사랑해주지 못했던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우리가 함께한 첫 일 년이 풋콩이에게는 십 년 같지 않았을까. 겨우 평생 가족을 만났는데도 외롭고 서글프지 않았을까.
어느새 나는 어엿한 ‘풋콩맘’이 되었다. 친구도 보호자도 아닌 엄마다. 이 개를 무조건 책임질 거라는 것, 우린 끝까지 함께할 거라는 것, 같이 있으면 행복과 웃음이 넘치게 될 거라는 걸 오 년 전의 나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이제껏 살면서 결코 후회하지 않는 선택은 풋콩이와 가족이 된 것, 그거 하나니까.